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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박정희 현창사업, 발상의 전환 필요하다국민의 일치된 견해는 아니지만 대다수의 국민들은 이승만은 ‘대한민국 건국과 산업화 기초 확립’, 박정희는 ‘대한민국 산업화의 완성’을 공로로 꼽을 것이다. 이 공(功)은 과(過)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가해야 할 부분이다. 지난해부터 ‘이승만박물관’과 ‘박정희박물관’ 건립에 대한 말들이 오가고 있다. 용산공원 확정시 ‘박정희박물관’ 건립 의견이 나왔고, 안국동의 송현공원에 ‘이승만박물관’을 건립하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사실 이 두 역사 인물에게 과가 없다면 이미 두 기념관이 국립으로 세워졌을 것이다. 세월이 지나 일부 지역의 이승만 동상이 철거되고, 공공시설 중 박정희 기념물 일부가 삭제되기도 하는 수난이 있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관련 단체가 기념관 건립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그러다 광화문 거리 정비사업이 논의되면서 두 분의 동상도 세우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세계적 관광지 광화문 거리에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동상만 있는 데다 광화문 월대까지 조성하게 되니 조선시대에 머물게 되는 공간이 된 것이다. 이에 근대의 두 인물 기념물을 더하여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상징거리로 바꿔야 한다는, 기존과는 다른 차원의 주장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광화문 거리는 차선의 축소와 인도의 공원화로 정비를 마쳤다. 그리고 윤석열 정부 들어서서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관심이 있게 되면서, 다시 논의가 있게 되고, 이승만의 경우는 우파 영화인들의 다큐 영화 제작 공개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여파는 어느 기간까지 계속되리라고 관측된다. 그런데 이 두 분에 대한 박물관(기념관) 건립 주장에 대해서는 성격과 방향에서 나름의 견해가 있다. 즉, 특정한 지역에 건물을 지어 기념화 하는 것보다는 ‘전 국토의 기념화’로 하자는 것이다. 두 분은 공교롭게도 장기 집권 탓으로 전국 곳곳에 작던 크던 기념할 만한 흔적들이 남겨져 있다. 이 구체적인 처소를 작은 기념 장소로 현창하는 방안이다. 이승만은 이화장을 비롯하여 한국전쟁 중 피난 정부 관련 장소 등이 있고, 박정희도 생가터를 비롯하여 문경 교사(敎師) 시절 머물던 ‘청운각’ 등은 물론, 전방 군부대의 기념비 등이 있다. 이런 유적들을 재정비하여 기념하는 장소로 활성화시키면 그야말로 실질적인 국토의 기념관화 효과를 거둘 것이다. 만일에 공적 기금이나 지원금이 있다면 연차적으로 각 지역 기념물과 처소를 정비하는 공동체를 선별하여 지원한다면 실질적이고 모범적인 기념사업이 될 것이다. 이것은 역사인물의 현창 사업에 대한 새로운 발상의 전환,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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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회 서편제보성소리축제 전국판소리 고수 경연대회(05/04-05)■ 대회명칭 제26회 서편제보성소리축제 전국판소리·고수경연대회 ■ 대회목적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 '판소리'의 계승발전을 위하여 경연대회를 통한 인재발굴 및 육성 ■ 대회일정 2024년 5월 4일(토) ~ 2024년 5월 5일(일) ※ 추모행사: 5. 6.(월) 14:00, 보성판소리성지 ■ 대회일시 및 장소 ■예선 ■본선 ※ 위 일정 및 장소(예선‧본선)는 상황에 따라 취소 또는 변경될 수 있음 ※ 학생부 종합: 판소리 학생 고등부 대상수상자와 고수 학생부 대상수상자가 경연 ■ 참가자격 대한민국 국민으로 18세(2006. 5. 3. 이전 출생자) 이상의 남녀 또는 학생(초·중·고등학생) 1. 판소리 명창부는28세(1996. 5. 3. 이전 출생자) 이상 가. 판소리 5바탕 중 한바탕 완창자 또는 2시간 이상 발표회를 가진 자, 또는 판소리 분야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화재청장상 수상자 나. 증빙자료 제출 : 완창 발표회 음원(CD) 또는 공연 리플렛또는 수상 증명서 (해당 부처 발급용 또는 주관단체 발급용 인정) 2. 판소리 신인부는 18세(2006. 5. 3. 이전 출생자) 이상 ~ 64세(1959. 5. 4. 이후출생자) 미만,장년부(노년부)는 65세(1959. 5. 3. 이전 출생자) 이상 3. 기존 수상자 참가 제한(본대회 및 타대회 모두 포함) - 동일종목·분야에서 최고훈격을 수상한 자는 최고훈격이 동일한 종목‧분야참가 제한 - 단, 최고훈격이 상이한 경우 동일종목‧분야 참가 가능하며, 이 경우에도 훈격의 하향신청은 불가 - 장년부(노년부)의 경우 타대회 수상 후 2년 경과한 수상자는 참가 가능 ■ 참가신청 1. 제출서류: 참가신청서 1부(소정양식, 반명함판 사진부착) ※ 판소리 명창부: 완창 발표회 음원(CD) 또는 리플렛 또는수상 증명서등 증빙자료 제출 ※ 경연대회 당일: 신분증 지참 필수 2. 신청서 교부 및 접수 ◦ 접수기간 : 2024. 3. 25.(월) ~ 4. 30.(화) 18:00까지 도착분 ◦ 참 가 비 :없음 ◦ 접수방법 : 방문·전화·우편·e-mail·FAX ※ 본인 및 대리신청 가능 ◦ 접 수 처 : 서편제보성소리축제추진위원회(보성문화원) - e-mail : bsm2629@naver.com - F A X : (061)853-2629 - 우 편 : (59453)전남 보성군 보성읍 송재로 281-11, 보성문화원 ◦ 접수안내 : (061)850-5892 / 852-2621, 서편제보성소리축제 (http://www.boseong.go.kr/tour/festivity/sopyonje) ※ 접수 후 반드시 전화 확인하기 바람 ■ 대회부문 부 문 경연시간(예선/본선) 비 고 판소리 명창부 30분 내외 / 20분 이상 - 예선 경연대목: 추첨 - 본선 경연대목: 자유 선택 (단, 경연대목이 중복될 때에는추첨에 의함) 대학 및 일반부 15분 내외 / 15분 내외 - 예선과 본선의 소리대목 중복 불가 신인부(단심제) 5분 내외 장년부(단심제) 5분 내외 학생부 - 고등부 7분 내외 / 10분 내외 학생부 - 중등부 5분 내외 / 7분 내외 학생부 - 초등부 5분 내외 / 5분 내외 고 수 명고부 10분 내외 / 10분 내외 대학 및 일반부 7분 내외 / 7분 내외 신인부(단심제) 5분 내외 학생부 5분 내외 / 5분 내외 ※ 경연시간은 대회의 효율적 진행을 위해 조정할 수 있음. ※ 고수는 집행부 지정고수로 하며, 필요시 경연자 대동 가능 ※ 판소리 대학 및 일반부 : 후 창자는 바로 앞 창자의 소리대목을 다시 할 수 없음. 다만 바로 앞 창자 소리대목 전체의 ⅕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전반부 또는 후반부에서 소리를 이끌어 나가거나 마무리를 위한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함 ※ 판소리경연대회(신인부, 장년부, 학생부) 현장에서 대목 변경 가능 ■ 시상내용: 총 60명, 상금 104,600천원 본선 경연 완료 후 현장 시상(신인부, 장년부는 예선 경연 완료 후 현장 시상)(단위: 천원)※명창부 대상 특전: 수상자는 보성소리 발전연구 결과로 12개월이내에 보성군내에서 공연발표를 하게 되며, 이때 보성군은 1회에 한하여 공연 무대, 홍보, 음향등을 무상 지원 ※ 시상금은 소득세법에 의거 원천징수 8.8% 공제 후 무통장 입금 ※ 판소리 명창부 최우수상 수상자에게는 (故)성창순상 시상금 지급 ※ 학생부 종합부문 수상자에 대해서는 부문별(판소리, 고수) 시상금은 지급되지 않음. ※청중평가단 인기상: 청중평가단만의 점수로 명창부 본선 경연자 중에서 결정 (훈격: 서편제보성소리축제추진위원장) ※부문별 장려상 - 판소리 학생부(고등부․중등부․초등부) 및 고수 신인부: 각 4명 선정 / 시상금 100천원 - 판소리 신인부 및 장년부: 각 5명 선정 / 시상금 200천원 ※본 행사 훈격 및 시상계획은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 심사항목 판소리 공력(30%) 박자(20%) 성음(20%) 음정(10%) 발림(10%) 가사(10%) 고 수 한배(30%) 공력(20%) 강약(20%) 기교(20%) 자세(10%) ※ 심사위원의 점수를 합산하여 고득점순으로 등위를 정한다. ■ 심사규정 1. 심사회피로 인한 경연자의 점수는 채점한 심사위원 점수 중 최고점과 최하점을제외하고 나머지 심사위원 점수의 평균점을 회피한 심사위원점수로 부여하여 합계점수를 산출한다. 2. 본 대회는 직접스승 및 8촌 이내 친인척의 심사회피제도를 적용하므로참가자는해당 심사위원의 심사회피를 경연전에 신청해야 한다. 만약 심사회피를 신청하지 않아 수상을 한 후 회피신청 사유가 있음이 발견될 경우에는수상 취소를 결정할 수 있고, 수상자는 상장, 상패, 상금을 반환하여야 한다. ※ 판소리 명창부에 한해 경연참가자의 이해관계가 있는 심사위원은 기피신청 여부와 관계없이 서편제보성소리축제추진위원회 심사위원 선정위원회 직권으로 심사위원에서 배제한다.(예선과 본선 모두 적용) ■ 심사결과 발표방법 심사위원별 점수를 경연 직후 또는 후창자 경연 중에 스크린(전광판)으로 공개 ■ 수상자 결정방법 수상자는 심사결과에 따라 순위별로 결정한다. 같은 부문에 동점자가 있는경우에는 연장자를 선순위로 한다. 학생부에 동점자가 있는 경우에는 고학년을 선순위로 하며 같은 학년일 경우에는 생년월일을 대조하여 연장자를 선순위로 한다. ■ 기타사항 판소리·고수 경연대회 본선 및 시상식 마을회관 실시간 송출 ■ 세부 프로그램 일정표(안) 장소별 시간별 보성군문화예술회관 보성군 청소년문화의집 보성문화원 보성 판소리성지 월ㆍ일 시 간 1층 공연장 2층 연습실 5. 4. (토) 10:00 ~11:00 ◦전국판소리경연대회 - 명창부(예선) ※추첨: 08:30 ※ 명창부 본선 추첨 :예선 종료 직후 ◦전국판소리경연대회 - 대학 및 일반부 (예선) ※추첨: 08:30 ◦전국판소리경연대회 - 대학 및 일반부 (본선) ※추첨: 예선종료직후 ◦전국판소리경연대회 - 신인부 - 시상식 ※추첨: 08:30 ◦전국고수경연대회 -학생부(예선) ※추첨: 08:30 11:00 ~12:00 12:00 ~13:00 13:00 ~ ◦전국판소리경연대회 - 학생부(예선) ※추첨: 10:00 초 10:30 중 11:00 고 ◦전국고수경연대회 -신인부, 대학·일반부, 명고부(예선) - 시상식(신인부) ※추첨: 10:00 신인부 10:30 대학·일반부 13:00 명고부 5. 5. (일) 09:30 ~10:00 ◦전국판소리경연대회 - 장년부(단심제) - 시상식 ※추첨: 09:00 ◦전국판소리경연대회 - 학생부(본선) ※추첨: 09:00 10:00 ~11:00 ◦전국고수경연대회 -학생부ㆍ대학·일반부ㆍ 명고부(본선) ※추첨: 09:00 11:00 ~11:30 ◦보성군립국악단 특별공연 12:00 ~12:50 12:50 ~14:00 ◦전년도 명창부 대상축하공연 ◦명인‧명창 고수열전 ◦학생부종합대상경연대회(본선)- 판소리 및 고수 ※추첨: 12:00 14:00 ~15:00 ◦명창부(본선) 15:00 ~16:00 ◦역대 대통령상 수상자 축하공연 ◦시상식 5. 6. (월) 14:00 ~15:00 ◦추모제, 추모공연 부대 행사 체험행사 <문화예술회관외부> ∙ 전통악기만들기 ∙ 캐리커쳐 음식코너 <문화예술회관 주차장> ∙ 보성주막집 ∙ 푸드코트 ※ 위 일정은 상황에 따라 취소 또는 변경될 수 있음. ■ 서편제보성소리축제 전국 판소리‧고수경연대회 역대 수상자 명단 구분 판소리 고 수 학생부 종합 명창부 대학‧일반부 신인부 장년부 학생부 명고부 대학‧일반부 신인부 학생부 고등부 중등부 초등부 제1회 1998년 - 추상수 성남 이정순 광명 - 김정은 여수여자고 최잔디 광주중앙초 - - - - - 제2회 1999년 유판길 서울 마미숙 광주 김연례 목포 - 박은실 광주예술고 김소진 광주동운초 - - - - - 제3회 2000년 박정아 광주 오혜연 서울 - - 임서연 군산 조나엽 강진 - - - - - 제4회 2001년 이귀례 익산 박명자 성남 - - 김소희 남원서진여고 강재민 광주문산초 - - - - - 제5회 2002년 허 숙 여수 김다정 광주 이동래 보성 - 김혜라 보성고 이성현 서울광장초 - - - - - 제6회 2003년 이재영 보성 백금렬 고양 - - 정지혜 서울국악예술고 김미영 광주풍암중 신혜인 광주경양초 - - - - - 제7회 2004년 허종열 서울 이은비 광주 - - 홍준표 대구 정아영 대구 양승은 광주 - - - - - 제8회 2005년 백금렬 보성 이숙영 서울 이기쁨 파주 - 유성실 김제 유다운 고흥 안유미 보성 고정훈 진도 이재진 경주 박초롱 경산 - - 제9회 2006년 라경자 고흥 박지영 서울 장세웅 서울 - 백민정 광주예술고 임한울 광주봉산중 양혜원 남원노암초 임용남 서울 김동근 광주 정상화 서울 - - 제10회 2007년 남궁정애 성남 김계영 서울 이일진 고양 - 이선미 광주예술고 이진우 서울국악예술중 정은영 광주대성초 김준영 완도 고현태 전주 박경도 광주 - - 제11회 2008년 문명숙 전주 채원영 남원 조혜숙 전주 - 오선지 전남예술고 윤영진 조선대부속중 김승수 광주도산초 정상화 안성 조가완 광주 이병열 광주 - - 제12회 2009년 박미정 광주 임성희 안성 김옥순 광주 - 주희라 광주예술고 조정규 전주온고을중 윤정이 광주교대부설초 정인성 광주 최재영 서울 김소라 서울 - - 제13회 2010년 이재영 보성 최한이 천안 양인심 순천 - 박경태 광주 박성열 익산 이승훈 광주 김병태 고양 박성우 고양 이진수 광주 - - 제14회 2011년 김학용 서울 오혜원 진도 정석호 광주 - 송선호 서울압구정고 이채은 화순제일중 양수아 목포하당초 조가완 광주 김정환 담양 정신이 전주 추재형 진도석교고 - 제15회 2012년 김현주 순천 송혜원 진도 김병희 대전 - 정서희 경남예술고 유시은 산청단성중 심민서 진주평거초 주현주 광주 장홍준 남원 양승화 순천 한재민 함평나산고 정서희 경남예술고 제16회 2013년 김명숙 서울 이철홍 목포 박창석 진도 - 정윤형 전주예술고 김가을 보성여자중 조세리 성남정자초 김준영 광주 진정남 울산 최승희 서울 조의연 영광초 정윤형 전주예술고 제17회 2014년 윤종호 나주 이선미 광주 이 숙 광주 - 김가을 보성고 노희선 화순제일중 김한별 보성남초 안연섭 광주 이주현 남원 이춘효 목포 박상민 광주예술고 김가을 보성고 제18회 2015년 윤상호 정읍 문해돋이 인천 김강인 남양주 - 박상훈 서울전통예술고 송자연 국립전통예술중 유송은 광주송우초 조요한 광주 대대호 광주 정행정 진주 양인승 진도국악고 박상훈 서울전통예술고 제19회 2016년 양희빈 서울 윤혜선 나주 김금자 창원 - 유시은 경남예술고 양수아 국립국악중 박정우 선일초 김제훈 강진 채규룡 진도 김보금 남원 윤지혁 목포덕인중 유시은 경남예술고 제20회 2017년 박정희 무안 김주리 서울 김은숙 광주 - 박서희 광주예술고 김선우 남원한빛중 박혜인 광주운남초 원대근 여수 박상민 안성 정대희 광주 윤지혁 진도국악고 박서희 광주예술고 제21회 2018년 어연경 고양 이이화 서울 양동용 서울 - 김정욱 광주예술고 박신웅 전주예술중 임아진 정읍한솔초 양인승 나주 한재민 광주 오영환 광주 윤지혁 진도국악고 김정욱 광주예술고 제22회 2019년 김미진 서울 정승기 광주 손순임 광주 - 윤지혁 진도국악고 박지민 국립국악중 이지윤 영천초 이충인 부산 조인경 경기 표진이 전주 김정욱 광주예술고 김정욱 광주예술고 제23회 2021년 유재순 서울 강예빈 전주 조헌성 전남 - 김수진 원광정보예술고 김송아 전주예술중 범하은 광주한울초 김성찬 전남 서형준 광주 박갑렬 전남 박수현 광주예술고 김수진 원광정보예술고 제24회 2022년 이은숙 제주 이다연 서울 김부자 고흥 - 장은탁 남원국악예술고 이예은 보성회천중 허정운 진도지산초 조인경 전주 우승연 부산 우성호 광주 채준서 진도국악고 - 제25회 2023년 임서연 무안 박시본 서울 김미영 창원 강호성 광주 정윤서 국립국악고 이예은 남원용북중 노규리 팔공초 이민후 담양 김강유 서울 박훈 광주 이지윤 광주 정윤서 국립국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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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세중과 전위예술(6) <BR> 狂氣와 執念의 사나이윤대성/희곡작가 무세중의 본명은 김세중이다. 그는 성균관 대학 불문과를 졸업하고 1962년 드라마센타가 개관되어 거기에 연극 교육기관인 연극아카데미가 생겼을 때 1기생으로 들어온 연극 지망생이다. 필자도 같은 과정에서 김세중과 함께 공부했다. 그때 아카데미 원장은 여석기 교수있고 우리를 가르친분 들은 柳溪 吳華變 金正鈺 梁東君 李杜鉉 등이었다. 약 20여 명의 인구생들은 매일밤 드라마 센타에 모여 강의를 듣고 명동에 내려가 술을 마시며 연극에 관해 토론했다. 이때 김세중과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별로 딴일할 것도 없는지라 매일 낮부터 하루종일 드라마센타에서 공연되는 연극을 보고 연습장면도 참관하면서 연극의 체질을 익혔다. 틈틈히 남산에 올라가 소주도 마셔 가면서. 그러다 얘기가 미진하면 그의 돈암동 집까지 가서 마시고 떠들며 소일했다. 우리의 대화는 항상 연극에 대한 것이었고 나의 작품 구상에 대한 비판이였다. 그는 나보다 늘 앞서가면서 어린 내 생각을 깨우쳐주고 자극을 주었다. 내 초기 작품의 상당수가 그의 조언을 받아 완성된 것들이다. 그때부터 우리는 우리의 전통민속에 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드라마센타에서 처음 초빙한 김노인으로부터 봉산탈춤을 배우고 있었다. 아마 그가 운동에 관심을 갖게되고 결국 몸짓을 통해서 목소리를 내는 방법을 자신의 연극표현의 수단으로 삼은 것도 이것이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는 드라마센타의 극작 WORKSHOP에도 참여하여 작품도 썼다. 그러나 그의 분방한 사고와 열기를 담기에는 원고지란 매체는 그의 사고를 제한하는 속박으로 작용했다. 그는 직접 작품을 제작하고 연출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자신이 출연하여 그의 몸 속에서 끓어 오르는 열기를 발산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 당시의 연극인들은 김세중하면 좀 돌지 않았나 할 정도로 그의 광기는 점차 도를 더해 갔다. 당시는 박정희 정권이 그 압제의 사슬을 조일때라 김세중의 광기를 용납할리가 없었 다. 그의 작품공연 기도는 번번히 제지당했다. 그는 강열한 메세지가 담긴 공연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는 민속춤, 탈놀이등의 전통연희로 돌아왔다. 이 때 김세중은 그의 성을 무로 바꾸었다. 그리고 민속주점을 경영했다. 그가 가장 어려웠을 시절이면서 또한 각오를 새롭게 한 시절이기도 하다. 성까지 바꿀 정도로 이 나라는 그를 받아들이기엔 너무 독선적인 제도하에 있었고 또한 연극계는 편협했다. 어느날 그는 훌훌 털어버리듯이 나라를 떠났다. 베를린은 그에게 신천지였다. 각국에서 모여든 광적인 정열을 지닌 연극인들과 무세중은 길 어울리는 앙상블을 이루었다. 역시 무세중은 리더였다. 그의 탄탄한 전통예술에 대한 이론과 춤 실력(?)으로 단연 그의 작품은 베를린의 실험극단들 중에서 빛을 발하게 되었다. 마음몇 벗고 마음껏 소리 지를 수 있는 곳, 그곳이 베를린이였다. 몇년 후 그는 귀국해서 "통·막· 살" (통일을 위한 막걸리 살풀이)이란 작품을 발표해 우리를 놀라게 했다. 그 후 그는 계속 우리를 놀라게 하는 작품을 발표해 언어를 배제하고 몸짓과 소리만으로 강한 메세지를 진부해지고 획일화 되어가고 있는 느낌이 없진 않지만 그는 부단히 실험하는 자세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새 목소리를 갈구하는 관객이 늘고 있다. 무세중에게도 또 한번의 변신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의 새 작품 "上下左右,東西南北을 기대한다. 거기서도 틀림없이 그의 광기가 그 집념을 빛을 낼 것이다. 198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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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공예대전 대통령상에 이영분 작가 선정국립무형유산원과 국가무형문화재기능협회는 '제48회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 대통령상 수상자로 이영분 작가를 선정했다고 12일 밝혔다. 대통령상에는 이영분 작가의 ‘정태제 묘 출토 금사 쌍학흉배’가선정되었다. ‘납사수’라는 희귀한 자수법을 활용하여촘촘히 문양을 이루듯수놓은 모습이 섬세함의 극치를 이룬다는 극찬을 받은 작품이다. 국무총리상은 여러 겹으로 꼰 명주실로 짠 끈으로 다양한 모양을 표현한 임금희 작가의 '다회 망수'가 받았다.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은 '용봉문 관복함'을 선보인 김종민 작가에게, 문화재청장상은 '대구 동화사 마애불 석조각'을 만든 최경교 작가에게 각각 돌아갔다. 국립무형유산원장상에는 묘사의 수려함이 느껴지는 현란한 세필로 8폭 병풍을 채운 박정희 작가의 '화성능행도 8곡병'이 선정되었다. 국가무형문화재기능협회이사장상에는 노진영 작가의 '거문고'가 선정됐다. 수상작은 이달 14일부터 22일까지 서울 강남구 국가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 전시관에서 전시된다. 전시 개막식과 시상식은 13일 오후 2시에 민속극장 풍류에서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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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19)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 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노래 '부용산'이다. 박기동이 노랫말을 쓰고 안성현이 지었다. 안치환과 윤선애가 불러 세간에 알려졌지만 오랫동안 금지곡이었다. 지난해 본 지면을 통해 '산동애가'를 다루면서 간략하게 언급한 바 있다. 부용산 가사를 빼닮은 절명(絶命)의 노래라는 카피를 붙였던 이유가 있다. 마디마디 포개진 혹은 다 말하지 못했던 굴절의 역사, 사람들이 전율하는 선율과 장단 행간에 겹겹이 쌓인 질곡을 고스란히 담아냈기 때문이었다. 그 중심에 월북이란 오명을 달고 있는 안성현이 있고 좌익이라는 딱지를 달고 평생 감시 속에서 살았던 박기동이 있다. 박기동은 천재 문학소녀를 위해 초빙될 만큼 출중한 문학인이었다. 안성현은 가야금산조의 중흥조라고 하는 안기옥의 아들이기도 하다. 훗날 박기동은 <부용산>이라는 책을 냈다. 나주문화원에서는 <안성현 백서>를 출간했다. <백서>에 의하면, 김 종 시인 등 숱한 연구자들에 의해 광폭의 추적과 노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가 이들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부용산 노래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해방 직후 1948년, 지금의 목포여자고등학교 전신인 항도여중에 김정희라는 학생이 있었다. 천부적인 문학소녀였던 모양인데 당시 교장이던 조희관이 이 학생을 위해 박기동을 교사로 초빙한다. 당시 목포는 수많은 문학인, 예술인들의 에너지가 폭발되는 용광로 같은 곳이었다. 근대문학의 시작을 목포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을 만큼 다종의 문학인들이 배출되었고 각종 문예대회가 열렸으며 예술공연이 펼쳐졌다. 박기동의 <부용산>(삶과꿈, 2002)에 의하면, 미네르바 다방 등지에서 박화성, 조희관 등 문학인들, 시인들, 평론가들, 음악가, 미술가 등 예술인들이 날이면 날마다 문학을 논하고 시대를 말하며 노래를 불렀다. 각종 다방이며 술집이며 공적 공간들이 르네상스기의 살롱 역할을 한 셈이다. 여기에 <항도여중 예술제>가 큰 몫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침 박기동과 함께 안성현도 채용되었다. 가야금의 중흥조 안기옥의 아들이어서인지 천부적인 작곡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부임한지 8개월여 뒤 김정희가 폐결핵으로 죽고 만다. 이팔방년 열여섯 나이였다. 안성현은 박기동의 습작노트에서 '부용산'이라는 시를 발견하고 곧바로 곡을 붙인다. 아끼는 제자의 죽음을 육자배기 선율에 얹어 절절한 심중을 담아낸 것.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노래 <부용산>이다. 물론 이 시는 박기동이 항도여중에 부임하기 전 누이의 죽음을 슬퍼하며 썼던 습작이다. 여수 돌산이 고향인데, 큰누이 박영애가 어린 나이에 벌교로 시집갔다가 폐결핵으로 죽고 말았기 때문이다. 방년 스물 넷 꽃다운 나이였다. 안성현이 곡을 붙이자 박기동은 마지막 구절을 상여 나가는 소리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 노래를 제망매가에 견주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배금순이라는 상급학생에 의해 초연된 이 노래는 항도여중 학생들의 입에서 입을 통하여 급속하게 퍼져나갔고 애틋한 사연들이 날개를 달고 스토리텔링되었다. 이후 한국전쟁, 빨치산, 월북, 좌익감시 등 파란만장한 분단의 시절들이 눈물과 핏물 속에서 구겨지고 찢겨지며 오늘에 이른 것, 우리가 익히 아는 내용들이다. 부용산 노래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해방 직후 1948년, 지금의 목포여자고등학교 전신인 항도여중에 김정희라는 학생이 있었다. 천부적인 문학소녀였던 모양인데 당시 교장이던 조희관이 이 학생을 위해 박기동을 교사로 초빙한다. 당시 목포는 수많은 문학인, 예술인들의 에너지가 폭발되는 용광로 같은 곳이었다. 근대문학의 시작을 목포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을 만큼 다종의 문학인들이 배출되었고 각종 문예대회가 열렸으며 예술공연이 펼쳐졌다. 박기동의 <부용산>(삶과꿈, 2002)에 의하면, 미네르바 다방 등지에서 박화성, 조희관 등 문학인들, 시인들, 평론가들, 음악가, 미술가 등 예술인들이 날이면 날마다 문학을 논하고 시대를 말하며 노래를 불렀다. 각종 다방이며 술집이며 공적 공간들이 르네상스기의 살롱 역할을 한 셈이다. 여기에 <항도여중 예술제>가 큰 몫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침 박기동과 함께 안성현도 채용되었다. 가야금의 중흥조 안기옥의 아들이어서인지 천부적인 작곡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부임한지 8개월여 뒤 김정희가 폐결핵으로 죽고 만다. 이팔방년 열여섯 나이였다. 안성현은 박기동의 습작노트에서 '부용산'이라는 시를 발견하고 곧바로 곡을 붙인다. 아끼는 제자의 죽음을 육자배기 선율에 얹어 절절한 심중을 담아낸 것.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노래 <부용산>이다. 물론 이 시는 박기동이 항도여중에 부임하기 전 누이의 죽음을 슬퍼하며 썼던 습작이다. 여수 돌산이 고향인데, 큰누이 박영애가 어린 나이에 벌교로 시집갔다가 폐결핵으로 죽고 말았기 때문이다. 방년 스물 넷 꽃다운 나이였다. 안성현이 곡을 붙이자 박기동은 마지막 구절을 상여 나가는 소리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 노래를 제망매가에 견주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배금순이라는 상급학생에 의해 초연된 이 노래는 항도여중 학생들의 입에서 입을 통하여 급속하게 퍼져나갔고 애틋한 사연들이 날개를 달고 스토리텔링되었다. 이후 한국전쟁, 빨치산, 월북, 좌익감시 등 파란만장한 분단의 시절들이 눈물과 핏물 속에서 구겨지고 찢겨지며 오늘에 이른 것, 우리가 익히 아는 내용들이다. 누이와 제자의 죽음을 애달파했던 상여소리 제망매가(祭亡妹歌) "죽고 사는 길이 예 있으매 저히고 나는 간다 말도 못다 하고 가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에 저에 떨어질 잎다이 한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누나 아으 미타찰(彌陀刹)에서 만날 내 도닦아 기다리리다" 우리 향가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월명사(月明師)의 제망매가다. 누이의 죽음을 다룬 노래여서 '위망매영재가'라고도 한다. 양주동이 해석을 하였는데, 연구자들에 따라 약간씩 다른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삼국유사>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월명사가 이 노래를 지어 불렀더니(제사하였더니),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나 지전(紙錢)이 서쪽으로 날아가 없어졌다. 하늘을 감응하게 하고 귀신을 감복시켰다는 향가의 주술력을 말하는 것이다. 박기동의 <부용산>에서도 향가의 전통을 승계한 숨결들이 포착된다. 한 가지에서 난 잎들이 가을 낙엽이 되어 떨어지나 우리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한다. 누이는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마치 낙엽처럼 날아가 버린다. 월명사는 미타찰(아미타불이 있는 극락세계) 곧 종교적 초월을 빌어 누이와의 재회를 염원하는데 박기동은 부용산 봉우리 휘감아 도는 바람결을 통해 누이의 흔적을 좇는다. 안성현은 사랑하는 제자의 죽음을 이 심상에 포개어 마치 남도의 만가(輓歌)같은 선율을 직조해 낸다. 어디 이것이 노래에 그치겠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떨어지는 월명사의 낙엽이기도 하고 벌교 부용산 봉우리를 맴도는 바람결 자체이거늘. 금지곡 <부용산>은 오래도록 우리 곁을 떠나있었다. 민족동란 전후기에 월북하거나 이른바 산사람이 된 이들이 많고 그들에 의해 많이 불리었기 때문에 문제 삼았던 것일 뿐이다. 새삼스럽게 <부용산>을 소환하는 것, 안성현의 월북은 월북대로 냉정하게 평가하되, 향가에서 김소월로 혹은 박기동으로, 고려가요에서 안성현의 선율로 이어지는 얼개는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지난 굴절의 시기를 거치며 쌓은 우리의 내공이 탄탄하다는 점에서 <부용산>은 보다 널리 불릴 필요가 있다. 나는 이 자신감이 교착된 남북의 물꼬를 트는 지혜라고 생각한다. <부용산>은 남도의 육자배기다 박기동이 글을 짓고 안성현이 곡을 붙인 <부용산>은 한마디로 말하면 남도의 육자배기다. 육자배기의 전형적인 떨고 밀고 꺾는 선율로 곡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남도전통의 시김새들이 새록새록 들어있다는 점도 그렇다. 죽음을 앞둔 빨치산들이 고향에 두고 온 누이며 부모며 형제자매들을 그리며 불렀던 한의 노래였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서슬 퍼렇던 박정희 정권에서도 남도의 어느 옴팍진(오붓한) 다방에서 이 노래를 숨어 부르던 이들이 있었다. 좌익이라서가 아니라 이 노래 자체가 우리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적 얼개나 음악적 결은 거슬러 올라 향가에 닿고 굽이쳐 올라 육자배기에 닿는다. 나주시립국악단 윤종호 감독은 늘 그렇게 주장한다. 단조 즉 마이너 기반의 계면조가 <부용산>뿐만 <엄마야 누나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스며들어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동요 <엄마야 누나야>는 김광수가 작곡한 것인데, 본래 안성현의 곡 <엄마야 누나야>는 전통음악 계면조 기반의 곡으로 사뭇 다르다. 가곡풍의 <부용산>을 굳이 그렇게까지 해석할 필요가 있겠냐고 반문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를 남도창법의 계승으로 풀이하지 않으면 법고창신의 큰 줄기를 놓치는 잘못을 범하고 만다. <엄마야 누나야>뿐만 아니라 김정호의 <님>을 비롯한 대부분의 노래들, 내가 이름 붙여둔 송가인이나 김태연의 '남도트로트' 창법에 이르기까지 <부용산>류의 법고창신에 대해서는 차차 고를 달리해 다루기로 하겠다. 오늘 막걸리 한잔 마시며 <부용산>을 불러봐야겠다. 1971년경 목포 예술인 공연 장면. 목포예총 제공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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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타고난 안무가 전황의 춤인생과 예술세계국악계로 지평 넓힌 정통파 무용가 이매방(1927-2015.8.7, 국가무형문화재 97호 살풀이춤 보유자, 27호 승무보유자), 강선영(1925-2016.1.21., 국가무형문화재 92호 태평무보유자), 김덕명(1924-2015.10.24, 경남무형문화제 제3호 한량무보유자) 전황(1927-2015,5,16,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국립창극단장)등 원로무용가들과 중견무용가 정재만(1948~2014), 임이조(1950~2013), 지희영(1949~2015) 등의 작고는 격동기 근대무용사의 산증인들이자 역사적인 인물들, 과거사를 증언해주고 알려줄 대영박물관과 같은 역사자료가 소실된 것 같은 안타까운 현실이 되었다. 전황선생님은 80대에도 청년같은 외모와 건강한 모습으로 공연현장에서 유일한 원로관객으로 뵙던 분으로 가장 장수하실 것 같았는데 지난해 갑작스런 비보에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간 전황선생님을 뵐 때마다 늘 말쑥한 양복차림, 반듯한 자세로 빼어나게 멋진 노신사의 모습에 부러움과 존경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움과 불가사이한 점도 많은 분이라는 데 누구나 공감하면서도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80대 고령임에도 청년같이 건강하고 멋지고 미남인 신사로 사셨던 비결은 무엇이었는가? 둘째, 세계적인 근대무용가 최승희의 정통파 제자이면서 몇 안 되는 남성 한국무용가인데 어찌하여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을 역임하였고 국립창극단 단장으로 활동하면서 국악인들을 이끄는 수장이 되었는가? 타고난 공연예술의 스타집안과 성장배경 전황(全璜, 본명 전두황)은 1927년 3월8일 함경남도 함흥시 남문리에서 전영술과 신명이의 5남3녀 중 7번째로 태어났다. 부친 전영술은 함흥시 재판소 앞에서 사법서사를 하며 유복한 가정을 꾸렸다. 부친은 해방 직후에 작고하였고, 모친은 6·25전쟁 직전에 작고하여 어려움도 겪었지만 형제자매들이 대중스타로 우뚝 솟아 있었기에 전황은 많은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맏형 전두옥은 역시 함흥출신 무용가 조택원과 고향친구였고, 영화 ‘아리랑’의 감독 나운규와 절친으로 영화배우 겸 권투선수였으며, 중국에서 배운 18기 무예를 이 땅에 처음 들여왔고, 승용차를 팔로 끄는 차력도 자랑했다. 누나 전옥(全玉, 배우, 본명 전덕례, 1911~1968)은 ‘눈물의 여왕’으로 무대와 스크린의 톱스타인 그녀를 보려고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셋째형 전두철은 서울심포니오케스트라 제1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했다. 사촌형 전운봉은 남한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하였고 북쪽에서도 인민배우로 대접을 받았다. 누나 전옥과 매형 강홍식(姜弘植, 1902~1971, 이시이 바꾸의 제자, 해방공간 당시 북조선영화촬영소 부소장, ‘봄타령’을 처음 부르고 유성기음반 취입한 가수)의 딸 강효실(姜孝實, 1932~1992)도 다 아는 영화배우이며, 강효실의 아들 최민수도 현재 유명한 영화배우로 활동하고 있어 전황의 가계가 한국 근현대공연사의 한 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전황의 딸 전미례는 본래 한국무용을 전공하였지만 아버지처럼 분야를 바꾸어 ‘재즈계 여왕’이라 불리는 재즈무용가로 활약하고 있다. 전황의 어린 시절 누나 전옥이 함흥 진사관에 공연하러 고향이 오면 집 앞에는 스타 전옥을 보려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그때 열서너 살 된 전황은 자랑스런 누나의 연극을 보기위해 친구들과 공짜손님으로 극장을 드나들곤 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전황은 1941년 함흥 제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함흥상업학교를 졸업하면서 예인의 삶 속에 젖어들어 갔으며, 맏형 전두옥의 영향을 받아 1946년(19세)까지 권투선수생활을 하면서 강인한 체력과 민첩한 몸동작을 단련하였다. 이러한 가계내력과 성장배경에서 알 수 있듯이 우선 국가적인 스타가 될 만큼 수려한 외모를 선대로부터 물려받았으며, 형제들과 친척들이 예술가들이 많다 보니 전황도 자연스럽게 그런 무용, 국악 등 전통문화를 익힐 수 있는 가정환경이었다. 또 새로운 문물, 스포츠, 영화, 연극 등 다양한 문물과 예술에서도 적응력이 강하여 뛰어난 연기력, 체력의 유전적 DNA가 흐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황선생님의 인물치레가 범상치 않은 점은 이러한 천부적인 집안내력에서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유명 연기자들과 예술스타들이 타고난 것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 후천적인 환경과 노력이 가미될 때만이 보석의 빛을 발산하는 것이다. 말년까지 정정하고 강건한 자태와 인품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 맏형으로부터 배우고 익힌 권투선수의 기초훈련에서 익힌 날렵한 잽 동작과 발 스텝과 빠른 호흡과 민첩성 등으로 무용가로서의 유연성과 리듬감, 손놀림과 발놀림 등의 신체적 바탕을 갖추게 된 것임도 알 수 있다. 최승희 제자로의 입문배경과 공연활동 전황의 춤인생은 당시 아시아는 물론 세계무대에도 잘 알려진 무용가 최승희와의 조우에서 비롯하였다. 1947년 3월 최승희가 전황의 고향 함경남도 함흥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을 때 마침 남녀무용수 단원을 한명씩 뽑는다는 소식에 명성을 듣고 전국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응시하였다. 전황은 젊은 혈기에 한번 도전해보자고 가벼운 마음으로 응모하여 오디션을 받았는데 뜻밖에 최승희의 눈에 들어 많은 젊은이들을 모두 물리치고 남자로는 유일하게 합격통지를 받고 평양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이것으로 무용경력도 없었던 전황은 1등 합격으로 운명적인 춤인생이 시작되었다. 권투선수로 다져져 손발이 빨랐고 눈썰미가 좋아 최승희의 춤시범을 센스있고 날렵하게 잘 따라 추어 무용수의 가능성을 인정받아 평양의 최승희무용연구소(1946년 8월 개소) 3기 연구생으로 입교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집에서는 ‘하고많은 거 놔두고, 남자 놈이 춤을 추냐’고 반대했었다. 전황은 집에 있는 공기총과 아코디언을 팔아 평양 최승희무용연구소로 갈 여비를 만들었다. 최승희무용연구소에서 받는 국비 400원과 전옥누나에게 받은 용돈 50~100원, 어머니가 보내주는 100원으로 생활비를 삼아 알뜰하게 살면서 열심히 춤을 추었다. 얼마 되지 않아 30여명의 연구생이 묵는 기숙사생 중에서 최승희의 숙소에서 먹고 자면서 배우는 수제자로 발탁됐으며 이로 인해 국비를 300원씩 더 받게 되었다. 당시 북측 정부에서 최승희에게 국비를 지원하고 있었는데, 최승희와 안막선생님께 면회를 요청하여 가정형편이 어려워 생활비가 부족하다고 전하니 국비 중에서 추가로 200원씩 더 지급해 주었다. 이곳에서 전황이 신흥(新興)무용(지금의 현대무용), 조선춤, 남방춤, 러시아춤, 발레 등을 배울 때 바로 위 선배로 김백봉도 있었다. ‘딴 딴 따따딴, 딴 딴 딴딴딴’ 최승희선생이 북을 치면 그대로 발맞춰 따라하는데 다른 사람보다 빨리 배웠다. 반주악사가 없을 땐 리듬감각이 탁월하다며 북과 장구를 치게 했던 것이 국악을 섭렵하는 시초가 되었으며, 이렇게 국악에 눈떠 훗날 국악협회 이사장을 지낸 바탕이 이때부터 형성된 것이었다. 그 후 전황은 국비 외에 800원의 월급도 받았는데, 그에겐 금전적인 수입보다 4년 동안 허실없이 배운 최승희 안무법과 음악선택법이 소중할 뿐이었다. 최승희 안무의 ‘초립동’은 안성희에게 배워 1947년(20세)에 추었다. "최승희 선생은 히스테리가 많았어요. 1948년 평양예술극장에서 제가 안성희·김백봉과 3인무 ‘옥중투사’를 추는데, 객석에 앉아 계신 어머님과 사람들이 ‘황아! 황아!’ 부르며 야단이셨죠. 그 소리에 저는 춤순서를 잊어버렸죠. 결국 최선생께 혼나고 긴 손톱으로 꼬집혀 살이 뭉개졌죠. 그만큼 완벽을 추구하셨고, 기억력, 창작력, 음악적 감각이 뛰어나셨구요” 전황은 1948년 고된 훈련 중에도 단원들 누구보다 동작과 자세, 그리고 순서익히기에서 남다른 끼와 천부적인 표현력을 인정받아 최승희무용단원으로 중국순회공연을 처음으로 다녀왔다. 중국순회공연을 하던 중 매란방의 〈손오공〉을 보게 되었는데 분장실의 매란방은 남성인데도 춤출 때는 여자같이 곱게 추었다고 하였다. 당시 최승희는 안무작업을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는데, 매일 아침마다 두 달 동안 몰래 숨어 ‘노사공’ 안무를 보던 전황이 결국 최승희에 발각되었다. 그러나 의외로 스승은 ‘재주있는 놈’이라며 악사 옆에 앉아서 보라고 승낙하였다. 이렇게 1947년부터 1950년 사이 4년 동안 최승희의 작업, 공연, 생활 등 모든 것을 전황과 김백봉만이 가장 소상히 알고 있는 산증인이 되었다. 1950년 6월 7일에는 100명 규모의 방소예술단원으로 출국하여 9일 걸려 러시아 모스코바에 도착했었다. "하루 종일 달려야 역 하나가 나와요. 치타에 도착하니 거지 떼들이 몰려들어 돈 달라, 빵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우리도 기차 안에서 빵과 과자를 배급받아 먹었을 뿐인데...” 이런 우여곡절 끝에 러시아(당시 소련) 모스크바 공연 중에 6·25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허정숙 단장이 ‘조국전쟁이 일어났다. 남한이 쳐들어왔다’고 하더군요. 지금 생각하면 방소예술단은 정치적 색채를 띤 단체였어요. 러시아 공연도 이미 약속된 공연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허정숙은 전쟁 중에도 예술단을 이끌고 공연을 감행하였지요. 러시아에서 기억에 남는 곳은 노보시비르스크에 있는 공연장이었어요. 러시아에서 가장 크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크다고 했는데, 무대에서 탱크가 돌고 10마리의 말이 거니는 규모였습니다.” 그 후로 예술단은 밤마다 이동해 귀국길에 올랐다. 평양으로 돌아온 후에 전황을 비롯하여 최승희무용단원들은 춤연습을 하다가도 폭격이 오면 최승희연구소의 지하실에 피하곤 하였다. 전쟁의 와중에 인민군이 점령한 서울 구민관에서 ‘해방의 노래’를 공연했다. 어수선하고 자유롭게 나다니지도 못했는데 장추화, 송범 등이 구경을 왔었다. 전황은 군인으로 위장하고 동양극장에 출연하는 전옥의 충정로 집으로 갔는데, 누나는 없고 그 집은 민청사무실로 사용 중이었다. 전황은 이산의 고통을 억누르며 ‘초립동’과 ‘목동과 처녀’를 추었다. 춤출 때는 이산의 고통을 잊었다. 무대에서 내려오면 평양으로 돌아가 가족과 만날 꿈만 꾸었다. 1950년 8월 예술단은 광주. 목포(여기서 이매방이 안성희와 전황의 춤을 봤다는 생전 증언을 들었다), 군산을 순회공연하고 평양으로 돌아가던 길인 조치원에서 북한 군표와 남한 돈을 한 뭉치씩 받았다. 전황은 남한 순회공연을 하다 철수 명령을 받고 평양으로 되돌아가던 중 최승희의 딸 안성희 일행과 헤어졌다. 중도에 안성희는 인민군에 붙잡히지만 최승희의 딸이어서 평양으로 무사히 돌아갔다. 가을 전황은 최승희딸 안성희와 헤어져 빨치산 잔류들과 산을 타고 군화 소리 난무하는 평양에 겨우 도착하였다. "최승희 무용연구소로 가니 러시아에서 공연할 때 사용하던 물건들이 그대로 있는 겁니다.” 그러나 가족은 없었다. 양복과 구두 등을 챙겨 스승 최승희가 있는 자강도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그때 전황의 운명은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평안도 석암에서 과일을 사러 가다 예술단 악사가족을 만났다. 그들은 "최승희도 여기 있다. 자강도로 가면 중국으로 갈 수밖에 없다. 누나가 있는 남한으로 가라”하였다. 그때 안성희와 김백봉도 만났다. 그리하여 전황은 석암의 악사네 집 지하에 숨어버렸다. 순수예술가로 살 길은 남한이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서울 가는 산길에서 사흘을 굶고 허기져 살길이 막막해 허리띠를 나무에 걸었다. 목을 매 자살하려는 순간에 드라마같은 일이 생겼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연주자 최옥삼(가야금산조 명인, 최승희 반주자)이 "어떡하든 살아야 한다”며 말렸다. 다시 평양으로 돌아가 숨어 있다가 숨은 사람들 대표로 전황이 미국 제일기갑사단 대적선전대를 찾아가 "최승희 제자지만 전옥의 동생”이라 하여 도움을 받으며 지냈다. 1951년 1·4후퇴 때 평양에서 서울까지 걸어서 내려왔다. 그때 조카 강효실(당시 20세)은 작가 이서구(백조가극단 작품 집필)가 지프차에 태워 서울로 보냈다. "충정로 누님댁에 가니 누님과 재혼한 매형 최일이 있더군요. 후에 누님댁은 트럭을 빌려 부산으로 피란가고 저는 국민제일 군위병으로 뽑혔으나 늑막염으로 군면제를 받고 뒤늦게 부산으로 갔죠.” 전옥은 백조가극단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당대스타인 김승호, 허장강, 배삼룡, 고복수, 황금심 등 백조가극단장 전옥의 밥을 먹지 않은 이가 없었다. 작고 전에 현재 육군사관학교 뒤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에 배밭을 소유했는데 남편 최일이 훗날 그 땅을 많이 팔았다고 한다. 전쟁은 함흥부자인 전황의 가족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었고, 북한에 생활기반을 둔 채 남한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힘겨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 중부터 안무가로 인정받은 남한생활 1951년 부산피난시절 전황은 한국민속무용연구소를 개소하여 전옥누님이 단장으로 있는 백조가극단과 무관하게 활동했다. 정인방이 전황을 찾아와 부산극장에서 공연할 무용극 〈처용랑〉의 마귀역할을 이인범(발레)이 사정으로 출연하지 못한다고 대신 출연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대본도 없이 음악을 맡은 나운영의 집에 가 피아노곡을 듣고 안무하여 마귀옷을 입고 현대무용같은 발레를 추었는데, 안무를 잘했다는 평을 받았다. 1953년 박녹주, 박귀희, 김소희, 박초월, 임춘앵 등이 주축인 여성국악동호회(여성국극의 효시, 1948년 창단)에서 활동하는 최승희 반주악사였던 박성옥을 따라 동래온천장에서 창극연습에 참가하여 유치진 작 창극〈가야금〉 초연 때 아쟁(박성옥으로부터 이미 배웠음)을 연주하였다. 그때 전황은 박성옥의 연주를 돕다가 한영숙의 춤 〈가야금의 노래〉를 보는데 안무적인 관점에서 아쉬운 춤판이었다. 그것을 눈치 챈 햇님창극단장 김주전이 한영숙에게 전황이 최승희 제자니 한번 시켜보라는 귀뜸을 주었다. 이 말을 들은 한영숙이 전황에게 안무해보라고 부탁해 인정받은 것이 오늘날까지 안무가로 자신감을 갖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특히 여성군무인 만큼 춤은 추지않고 안무에만 열중하여 여성국악동호회의 후신인 햇님창극단은 잘 나가게 되었고 전황은 안무가로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작품 〈햇님달님〉에서 라이벌인 박귀희(햇님)·김소희(달님)가 노래하고 안무는 전황의 몫이었다. 국악을 듣는 귀가 있으니 다른 이가 일주일 걸릴 안무를 하루나 이틀에 완성했다. 동래온천장 공연은 자금이 넉넉해 신선놀음이었지만, 여성국극단이 예닐곱 개씩 생기다보니 서로 제살깎기식 경쟁을 했고 결국 해체를 거듭하다 국립창극단이 태동하게 되었다. 당시 출연료는 명창이 1만원, 악사는 9천원, 안무가는 6천원 정도 받았다. 돈을 벌게 된 23세 전황은 1951년 11월 이조판서를 지낸 집안의 딸 다섯 살 연하의 김봉선과 금정사에서 결혼하였다. 여성국극에 반한 동래여고 출신 김봉선이 햇님창극단 오디션에 뽑혀 무용수로 투입되면서 사귀다가 눈이 맞았었다. 처형이 예기 김강남월로 7세에 레코드를 취입한 천재소녀 명창이었다. 그가 소리한 뒤 순서에는 서로 무대에 나가길 꺼릴 정도였다고 하였다. 당시 누님 전옥은 예술가가 일찍 결혼하면 신세망친다고 반대했었지만 결혼 후에는 처가살이를 했다. 첫아이는 출생 직후 죽었고 5년 후 태어난 전미례(52·서울전미례 재즈무용단대표), 죽은 딸의 이름 ‘미례’를 다시 붙였다. 전황의 2남2녀 중 맏딸 전미례만 춤을 물려받았다. 펄펄 나는 힘과 예술적 열정을 미국 재즈유학에 쏟았고 국내 재즈무용계 무용학 박사 1호를 기록했다. 6·25 전쟁 후 부산에서 북한 출신들이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살 때 최승희 제자인 전황은 전옥의 신원보증으로 안무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당시 이인범, 송범은 활동하지 않았고, 김백봉도 북한출신의 최승희 제자라는 이유로 조용했었다. 생업을 유지할 수 있는 최적의 터전이 국극판이었다. 김백봉, 강선영 등도 여성국극단에서 안무했었다. 국극에는 오프닝춤, 상징춤, 경사춤, 피날래춤 등 적어도 너댓 가지 춤이 필요했다. 전황은 국극을 안무하며 창을 계속 들었기에 귀명창이 되었다. 희로애락이 녹아있는 창을 들으며 누구보다 빨리 안무했다. 50여년 이상 국악을 들으며 입으로는 안 되지만 손하고 가슴 속으로는 연주가 가능했다. 〈벌에 쏘인 꽃〉 등 수많은 국극과 창극을 안무했다. 대표작은 첫 작품인 〈가야금〉.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우륵을 따라간 가실왕과 그를 사모한 배꽃아기의 사랑이야기 자체가 건전해 마음에 쏙 든다고 했다. 무용작품도 전황류 〈부채춤〉, 〈장구춤〉, 〈소고춤〉, 〈장검무〉, 무용극〈황우와 우미인〉, 〈시집가는 날〉 등 셀 수 없이 많았다. 당시 명창 박귀희와 김소희는 형님아우 하면서 잘 지냈지만 서로 최고이고 싶어 했고, 서로 전황에게 하소연했었다. 박귀희의 명성이 더 앞섰기에 김소희는 늘 불만이었다. "내가 나이도 위고 소리도 잘 하는데 왜 밤낮 박귀희 다음에 김소희냐?”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박귀희는 스스로 김소희만큼 소리가 못하다는 걸 깨닫고 가야금병창으로 인간문화재 지정을 받았고, 김소희는 판소리로 지정받았다. 북한출신이고 최승희의 제자라는 이유로 소외시켰지만 실력으로 춤을 인정 전황은 최승희 선생에게 배운 춤을 바탕으로 창작했으니 내 몸에서는 항시 최선생님의 춤냄새만 난다고 술회하였다. 그러나 아이가 생기자 무용만으론 생활비가 되지 않자 영화사 일도 하고 백조가극단도 봐주고 돈이 되는 일이면 창극단 안무도 하는 등 최승희선생님으로부터 배우고 익힌 춤실력과 안무력을 바탕으로 바쁘게 살았다. 또한 늘 북한콤플렉스가 있었다. 예를 들어 흰 의상과 빨간 의상을 입고 추던 무용수들 가운데 빨간색이 가운데로 몰리는 춤이 나오면 임검석에서 보자고 하여 누가 안무했느냐? 왜 빨강색 의상이 가운데로 몰리느냐? 꼬치꼬치 따져 마음대로 창작할 수 없었다. 또 남한 무용가들은 '이북에서 온 주제에 어디를 넘봐' 하는 식으로 질투하기도 했다. 부산피난시절 여성국극단 안무를 할 때 "전황이가 누구냐” 고 하더니 무조건 쇠고랑을 채운 적도 있었다.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간 그에게 "왜 남한으로 넘어왔느냐”면서 간첩취급을 했다. 물론 매번 누나 전옥이 보증을 서서 풀려났지만 그 후로도 국가보안법으로 경찰에 잡혀가기도 했다. 그렇지만 다른 이들은 북한출신임을 숨겼지만 전황은 스스로 떳떳하게 밝히곤 하였다. 자신뿐만 아니라 당시 김백봉과 남편 안제승도 종로경찰서에 불려갔으며 북한출신이어서 차별도 받았다. 올림픽 때 안무를 맡고 싶었는데, '전황이는 이북에서 왔다'며 그를 추천하지 않아 참여를 못한 적도 있었다. 초기의 무용가들은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행사안무를 추천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말 외롭게 홀로 투쟁하며 능력과 실력을 인정받아 자리를 얻었다. 문화관광부 등 정부에서는 실력 있다고 알아주었다. 한국민속예술단원 및 안무자로서의 왕성한 해외활동 1958년 국극의 전성기까지 안무가로 활동한 전황은 결혼 후 서울로 이주하여, 1963년 광화문에 신흥무용학원을 내었고, 체계적인 춤교육 덕분에 조교를 두 명이나 두고 지도하였다. 1963년 서울민속무용단 활동과 더불어 예그린 무용부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그 후 합창단, 무용단, 관현악단 등 300명의 단원들은 운영에 어려움이 있어 해체와 재창단을 거듭하며 예그린도 100명으로 줄었다. 이렇게 말기 멤버로 동참한 전황은 권려성의 후임으로 예그린 무용부장으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1964년 일본 도쿄올림픽 경축파견 한국민속예술단 총감독 및 안무·연출을 맡았으며, 1964년에는 명동국립극장에서 이틀 동안 제1회 춤 발표회를 가졌다. 이틀 공연은 대박이었다. 흥행사가 붙은 공연은 대전에도 초청됐다. 당시 김백봉은 필동에 연구소를 차렸고, 장추화의 제자 송범은 현대무용을 추었다. 그 후에도 1967년까지 매년 전황 민속무용 발표회를 가졌다. 1967년 정일권 국무총리 때도 계속 민속예술단에서 활동했다. 1968년 한국민속예술단 지도위원 및 출연자로 멕시코 올림픽·일본 공연을 하였다. 송범, 김백봉, 김문숙, 전황 등과 함께 조택원을 중심으로 구성된 그들은 세계 각국을 순회공연을 하였다. 그 때 전황은 〈부채춤〉 〈농악〉 〈장고춤〉 〈무당춤〉 등 동적인 춤을 안무하고 추었다. 1970년 정부문화사절단 지도위원으로 일본 및 동남아 순회공연을 하였고, 1971년 정부문화사절단으로 네덜란드 영국 스페인 레바논 일본 등 순회공연, 1972년 정부문화사절단 무용총감독으로 유럽·중동·아프리카·동남아 등 24개국 순회공연, 1973년 문공부 파견 일본 신주쿠 고마극장에서 〈춘향전〉 안무와 국립창극단 〈배비장〉 안무를 하였다. 1976년 국립무용단 지도위원으로 문공부 파견으로 일본 도쿄국제극장 쇼치구가무단의 〈심청전〉을 안무하였다. 1977년 정부문화사절단 유럽 11개국 순회공연을 가졌다. 1978년 하와이이민 75주년 기념 한국민속예술단 연출·안무를 맡았으며, 1981년 제12대 전두환 대통령 취임기념 공연 및 대예술제에 연출·안무로 농악을 올렸다. 이처럼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국가적 행사와 해외공연의 안무자로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무용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특히 전국적으로 흩어진 〈농악〉을 무대화한 주인공이 바로 전황이다. 한두 시간씩 치는 농악을 15분 정도로 압축해 많은 가락과 춤사위를 정리했다. 김덕수와 최종실 등 사물놀이패가 구성되기 전 좌도농악과 우도농악의 좋은 점을 뽑아 50~60명이 오르는 무대농악으로 구성했다. 처음 선보인 건 1963년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 공연에서다. 교방춤과 마당춤을 극장예술로 다듬으면서 극장양식의 변화를 주도했다. 한국국악협회 이사장과 국립창극단 단장을 역임한 전황 최승희 제자로 안무가와 무용가로 활동한 전황이 어찌하여 무용협회 활동을 하지 않고 국악협회로 발을 돌렸을까 의문이 든다. 1964년 한국국악협회 무용분과위원장을 맡고 14년 동안 국악협회 활동을 하다가 1988부터 1991까지 한국국악협회부이사장으로 활동한 배경도 무용계에서는 북한출신이라는 배타성, 남성이 남성춤을 추지 않고 여성춤에만 치중하는 모습, 성정체성의 문제를 받아들이기 쉬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1992년부터 1994년까지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이 된 그는 한국방송광고공사에서 하는 대한민국국악제를 협회 주최로 이끌어 오는 등 40여 년 동안 한국국악협회에서 역동적인 남성춤을 안무하였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타악과 현악과 성악을 터득하여 국악계에서 활동한 것이다. 국립창극단과의 인연은 1973년 〈배비장〉 안무를 맡으면서부터였다. 물론 여성국악창극단이 활동한 1950년대와 1960년대까지 창극에서의 역할은 거슬러 올라가지만 1996년부터 1997년까지 국립창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을 맡게 된 것이다. 이어서 1999년 중국 베이징 국극공연 〈황진이〉 예술감독을 맡았으며, 그해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고법(鼓法) 이수자가 되었다. 고법은 창극단 시절 한일섭과 정철호로부터 조금씩 배워 연주에 참여했던 것을 인정받아 이수증을 받게 된 것이다. 2000년 창작민요극〈진도에 또 하나의 고려 있었네〉와 창무극〈해상왕 장보고〉를 안무했다. 일본어능력시험 1급 자격도 땄다. 일본공연을 자주 가고 일본작품 〈제비〉도 번역할 정도였다. 2002년 문화재청 파견 한·일문화교류의 해 〈천년의 소리〉 일본순회공연 예술총감독도 맡았다. 그리고 2004년 국립창극단 자문위원을 위촉받아 자문하였고, 2005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겸임교수로 10년을 출강하여 마지막까지 춤열정을 후학들에게 쏟았다. 그리고 201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최 한국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사업의 대상으로 춤과 국악 생애를 증언하였다. 다만 장년 이후 춤을 많이 추지 않고 안무를 주로 했기 때문에 제자가 많지만 어려서부터 춤을 배워온 윤성주와 딸 전미례 등이 있고 말년의 제자로는 김지원, 백선희 등이 있을 뿐이다. 전황의 예술세계 전황은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 문하에서 사사했고, 1951년 한국민속무용연구소를 설립했으며, 1964년 일본 동경올림픽 경축파견 한국민속예술단 총감독과 안무연출을 맡는 등 정부 문화사절단으로 각국에서 '춘향전', '심청전' 등 여러 작품을 선보였다. 그는 한국민속예술단원과 안무자로 유럽 3회, 동남아시아 2회, 미국, 러시아, 중국, 중동, 일본 등 당시엔 한 번 나가기도 힘들다는 외국 공연을 수십 차례 다녔다. 덕분에 국민훈장인 동백장도 받았다. 1988년 사단법인 한국국악협회 부이사장을 거쳐 1992년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으로 취임했고, 1996~97년 국립중앙극장 국립창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을 맡았으며, 무용계뿐만 아니라 국악계에서도 널리 업적을 남겼다. 전황이 남긴 예술혼과 예술철학은 몇 가지 굵직한 교훈과 한국공연예술사에 족적을 남겼다. 첫째, 최승희의 가르침에서 터득한 창작력과 뛰어난 안무력을 바탕으로 민간예술을 민족적 무대예술로 승화시킨 점이다. "저, 최승희 제자예요. 최승희! 최승희 무혼(舞魂)의 흐름이 제 춤에 들어 있다고요. 그 자부심 하나로 이 땅에서 타협하지 않고 외롭게 홀로 투쟁하며 살았습니다.” 음악적 소양이 뛰어났던 최승희가 전통악기를 개량한 악기반주에 맞춰 민족무용과 국극을 안무하고 창작하던 것을 이어받은 전황은 안무력과 창작력을 발휘하여 ‘마당농악’을 ‘무대농악’, ‘민간춤’을 ‘무대춤’ 등으로 민족무대예술을 발전시켰다. 둘째, 북한출신 콤플렉스를 딛고 일어서 이념갈등 속에서도 남한예술가로 자리매김하며 본인만의 순수공연예술작품을 창작하였다. "북한콤플렉스가 있었어요. 예를 들어 빨간 의상을 입고 추던 무용수들 가운데로 몰리는 춤이 나오면 임검석에서 저를 보자고 하여 마음대로 창작할 수도 없었죠.” 때로는 쇠고랑도 채웠고,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가 간첩취급도 당하는 등 북한출신이어서 차별도 많이 받았으며, 북으로 넘어간 최승희 제자라는 이유로 편견이 상존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운 고향마저 버리고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을 펼칠 수 있는 남한을 택했고, 굴하지 않은 신념으로 자신만의 예술혼을 살려보고자 각종 공연예술에 전념하였다. 셋째, 여성편향적 경향과 비중에 편향된 사조에 맞서 외롭게 역동적인 남성예술의 복원과 추구에 앞장서 남녀예술의 균형발전과 공존사상을 심어주었다. "우리는 최승희 선생께 남성춤, 여성춤을 확연히 구분해 배웠는데, 왜 남성들이 그리 여성스럽게 추는지‥‥‥‥” 여성춤은 곱고 이쁘지만 남자는 남자다운 춤을 추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본인 스스로도 살풀이춤, 입춤같은 춤을 춘 적도 없고 장검무, 소고춤, 장고춤, 농악춤 등 남성성이 강한 춤을 추고 가르쳤다. 혼자의 힘으로 대세를 역전시키기는 역부족이었지만 그는 남성은 치마(여성)춤만 추지 말고 바지춤을 추어야한다며 남성예술과 여성예술의 균형발전을 도모하는 일념으로 살았다. 하지만 전황은 이매방이 가장 춤을 잘 춘다고 했다. 60여년 친구이지만 전황은 남자가 여자처럼 춤추는 게 싫었다. 최승희 문하에서 수년 동안 남성춤과 여성춤을 구분해야 한다는 사상이 골수에 박힌 그는 춤추는 남성들의 대부분이 여성화된 춤을 추는 게 못마땅했다. 그때부터 그는 무대가 좋지만 무대에 가급적 서지 않았다. 여성적인 춤을 추는 이들과 동일시되는 게 싫었다. 게다가 딸 전미례가 아버지의 성정체성과 취향을 의심하는 듯한 발언을 해 그때부터는 가끔 서던 무대마저 무대화장을 전혀 하지 않다가 전두환 대통령취임식 때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선 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넷째, 한민족예술의 본질인 가무악(歌舞樂) 일체사상과 악무극(樂舞劇) 합체사상을 표방하고 심어주었다. "국악을 알아야 무용을 창작할 수 있어! 특히 장단의 귀가 뚫려야 산조를 들을 줄 알아야 춤을 만들 수 있지!” 우리 민족은 원래 국악따로 무용따로가 없이 악가무 일체의 예술적 특성을 지닌 민족이다. 전황은 이러한 민족예술과 춤의 본질적 특성을 올곧게 지닌 예술가였다. 서구예술의 전공분화시대에서 소외됨을 무릅쓰고 총체예술의 중요성을 몸소 실천하였다. 전황이 한국예술계에 남긴 것 한국 신무용의 핵심이 최승희에서 비롯됐기에 스승 최승희에 대한 기억을 소상히 간직한 전황의 자부심은 귀하고도 올곧았다. 최근까지 남한에 생존해있는 최승희의 대표제자로는 김백봉과 전황뿐이었는데, 유일한 남자제자인 전황선생님의 작고는 신무용시대의 대표적인 적통자이며 전승자의 인맥단절을 의미한다. 그는 평생 최승희의 춤사상을 실천하고 끊임없이 남성춤을 추구해온 근대무용의 산증인이었으며, 무대농악의 창시자이고 국극과 창극에서도 영원한 안무자로 자리매김하여 국악계의 수장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등 한국 근대예술사의 한 획을 긋고 떠났다. 끝으로 전황은 예술계의 간디라는 생각이 든다. 간디가 비폭력, 불복종, 무저항, 평화주의자이였듯이, 전황은 빼어난 외모와 타고난 스타집안의 피를 이어받았고 당시 세계적인 한국무용가 최승희의 남성제자였기에 한국무용계에서 스타반열과 직책에 오를 수도 있었지만, 여러 정체성 문제로 혼돈의 시대를 살면서도 묵묵히 세태에 복종하지 않았고, 이념전쟁의 희생양이었지만 본인만의 색깔과 예술혼을 불사르며 국가, 사회, 문화계에 무언의 항거를 보여주었다. 국악계로 발을 돌려 커다란 족적을 남기면서 끝까지 무용계를 탓하지 않았다. "전황류 소고춤, 전황류 검무, 전황류 쌍검무, 전황류 농악을 만들었지만 최승희 선생의 혼이 들어가 있다는 거죠. 남자는 남자답게 씩씩하게 ! 그래서 저는 절대로 무대에 오를 때 화장하지 않았습니다. 미례가 나의 성정체성에 의심을 품을 때부터 완전히 화장을 그만두었죠.” 그러나 인생을 살다보면 아쉬움도 남는 법이어서 전황선생님이 마지막 남긴 말씀이 떠오른다. "피리 등 관악기만 못해보고 타악과 현악은 웬만큼 해봤지! 그런데 아쉬움이라면 거문고 산조를 못해본 것이 가장 한이 맺혀! 술대로 현을 드르렁 긁는 소리가 마음을 후벼 파는 듯한 멋을 느낄 수 있는데 말이다.” 〈수상〉국무총리표창(68년), 문화공보부장관 표창(69·70·71·72년), 국민훈장 동백장(73년), 문화공보부장관 감사장(81년),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공로패(82년), 한국국악협회 국악대상(98년), 문화재청 공로 감사장(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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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훈 의원 , “ 광화문 현판은 대한민국의 간판 , 당연히 한글로 쓰여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이병훈 의원 (더불어민주당 , 광주 동구남구을 ) 이 12 일 문화재청과 그 소속기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광화문 현판의 한글화를 촉구하고 나섰다 . 광화문 현판은 1968 년 광화문 복원 시 함께 제작되었는데 , 아무런 고증도 없이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을 현판으로 만들어 걸었다 . 2010 년 광화문을 다시 건축하면서 나름의 고증을 거쳐 조선 말 경복궁 중건 당시 훈련대장 이었던 임태영의 글씨를 복원하여 한자 현판이 걸리게 된다 . 새로운 한자 현판은 석달만에 금이가면서 현판의 고증과 제작에 문제가 있음이 드러났고 다시 같은 형태로 제작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었다 . 2017 년 문화재청은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소장자료와 구한말 궁중화가 안중식의 작품을 토대로 광화문 현판이 ‘ 어두운 바탕에 밝은 글씨 ’ 라는 결론을 내리고 다시 제작에 들어가 검정 바탕에 황동 글씨의 현판을 제작한다 . 글씨체는 임태영의 한자 글씨 그대로이다 . 이 현판이 15 일 새롭게 광화문에 걸리는 것이다 . 광화문 한자 현판에 대한 찬반의견은 팽팽하다 . 한자 현판을 반대하는 주된 논거는 현재의 현판이나 새롭게 걸릴 현판 모두 고증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 현재 경복궁 재건당시 광화문의 정확한 형태를 고증할 수 있는 자료는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 글시체의 주인공인 임태영에 대한 자격 논란도 있다 , 임태영은 무관으로 천주교도들을 박해한 경신박해의 주모자로 행실이 좋지 못하여 조정으로부터 파면당했다는 기록이 있는 인물이다 . 조선의 정궁 경복궁의 정문 현판 글씨의 주인공으로는 부적합하다는 의견이다 . 이병훈 의원은 광화문 한글 현판의 필요성을 지난 국정감사와 상임위원회에서도 꾸준히 제기해 왔다 . 이병훈 의원은 " 광화문은 해외 관광객들이 반드시 들르는 곳인데 그곳의 이름이 중국의 글씨로 쓰여져 있는 것은 말이 안된다 ” 라며 " 세종대왕의 동상이 자리잡은 세종로가 시작되는 지점이자 , 한글이 창제된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의 현판은 한글이어야 한다 ” 고 광화문 한글 현판의 당위성을 힘주어 강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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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근대 전반기 대구지역춤의 전승 인맥(人脈) 고찰Ⅰ. 대구지역춤의 생태문화적 환경 대구는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중남동부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백두대간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더위는 심하고 기간도 길고 봄이 짧으면서 계절의 변화가 급속한 전형적인 대륙성기후를 보이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신라의 찬란한 문화를 배경으로 형성된 영남북부의 교통, 문화, 교육의 중심지이다.또한 대구인들은 뛰어난 적응력과 강안한 개척정신, 의리와 결단력을 매우 중시하여 든든한 느낌이 든다. 배타적이고 무뚝뚝한 점도 있지만 애교있는 여성도 많고, 대도시라 그런지 덜 폐쇄적이고, 전통적으로 보수성과 선비정신이 높은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지리와 기후환경적으로 대구지역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여 있어 분지기후(盆地氣候)를 이루고 있어 분지 내부의 복사열 등의 더운 기온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여 대체로 비가 적고 매우 건조하며, 여름은 무덥고 겨울은 덜 추운 지역이다.또한 역사문화적으로 넓게는 신라문화권에 속하며, 행정적으로는 영남북부문화권, 민속적으로는 백중문화권(단오 추석문화권), 내륙문화권이라는 광역적 성향도 기저에 깔려 있다. 따라서 대구지역만의 독특한 춤문화를 형성하고 발전시켜 미시적으로는 대구지역춤이며, 광역적으로는 영남춤의 성향을 지니고 있으면서, 거시적으로 한국춤계의 중요한 춤문화권과 영향력으로서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근대시기 6.25한국동란으로 일시적이나마 대구에 중앙국립극장이 옮겨지면서 수많은 예술인과 무용들이 집중되는 현상으로 문화예술의 중심지가 되었었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번 대구에서 펼쳐지는 세계안무페스티벌과 안무학술포럼을 통해 대구지역춤의 역사와 춤인물과 인맥과 현황을 고찰함으로써 대구지역춤의 역사에만 머물지 않고 한국춤의 역사 속에 자리매김하고 미래춤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조선조 전통문화시대를 지나 1900년대 초부터 1960년대 이전까지 서구문명과 외래문화의 범람시기에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소멸되어가던 전통춤 전승에 수구적(守舊的)이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 춤인맥을 고찰하고, 또한 시대조류에 따라 새롭게 형성되는 국제적인 근대춤 정착에 헌신한 춤인맥을 살펴 대구지역춤의 전승과 무용사적 의의를 살펴보기로 한다. 다만 심도있는 연구가 아닌 포럼이기에 아쉽지만 개괄적인 고찰에 머물 것이며, 연구방법은 문헌연구로 그간 대구춤과 관련한 학위 및 학술논문과 평문 등을 일별하여 요약문을 작성하였다. 대구지역춤 관련한 학위 및 학술논문 등은 한국교육학술정보원(RISS)을 검색어를 통한 문헌 내용과 필자 소장문헌을 중심으로 고찰 정리하였다. 또한 대구무용계의 여명기를 개척한 1세대를 중심으로 뒤를 이은 2세대에 한하여 20세기 초중반기(개화기부터 1960년대까지) 무용인물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Ⅱ. 대구지역춤의 근대사적 배경 전통시대(조선조)의 춤은 대체로 궁중춤(정재, 일무), 민속춤(예인춤, 민간춤), 종교의식춤(불교춤, 무속춤) 등으로 전승되어 왔지만 우선 관심의 대상은 기방춤으로 궁중과 선상기(選上妓)로 활동하던 지방관기 전승의 교방춤과 기방춤으로 전승되어왔다. 대한제국시대와 한일합방의 급변속에서도 20세기(1900년대) 근대초기 관기제도의 폐지와 기생조합과 권번의 등장과 궤를 같이하며 경향 각지에서 나름의 전승체계와 색다른 공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전개되고 있었다. 우리나라 기생조합은 1904년 10월 10일 일본공사관의 제3호 경성관령으로 비롯된 창기 창녀의 사회적 공식화부터 비롯된다. 궁내부 제도 개편의 일환으로 시행된 1905년 여악(女樂)의 폐지, 1908년 7월에 ‘향사이정조칙(享祀釐正詔勅)’으로 관기들이 소속된 태의원(太醫院)의 의녀(醫女)나 침선비(針線婢) 등이 해체되면서 관기제도가 폐지되고 그해 8월 24일에 장례원 장악과가 해체되었다. 아울러 1908년 9월 15일 기생 및 창기 단속령과 1909년 4월 경시청의 창기조합조직 명령건 제정 등에 의해 우리나라에 적용한 일제의 공창화(公娼化) 정책에 의해 설립된 전국의 기생과 창기들의 동업조합이 곧 ‘기생조합’이다. 한편 기생조합소는 기업(妓業)을 주관하는 사업체 및 운영 사무실을 지칭하는 것인데, 초기에는 기생조합 또는 창기조합이라고 불렸다가 1917년경부터 일본식으로 ‘권번(券番)’이라 바뀌었다. 한국의 근대화의 물결과 근대춤의 시작은 대체로 1900년 전후로 나타난 세계사적 물결과 주변국과의 교류에서 비롯되었으며, 국내적으로도 조선시대 말 갑오경장(1894년)과 대한제국시대에 거스를 수 없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문화조류가 파급되면서부터이다. 1902년 최초의 서양식 극장인 협률사(協律社)가 경성에 설립되어 그해 12월 4일부터 <소춘대유희(笑春臺遊戱)>가 공연되었다. 그후 1907년 광무대(光武臺), 단성사(團成社), 연흥사(演興社), 1908년 장안사(長安社) 등 극장이 개설되었고, 광무대에서는 관기(官妓)의 가인전목단·검무(劍舞)·남무(男舞)·무고(舞鼓)·무동·성진무(聖眞舞)·승무(僧舞)·시사무(矢射舞)·이화무(梨花舞)·전기광무(電氣光舞)·지구무(地球舞)·한량무(閑良舞)등과 같은 춤 종목은 활동사진과 함께 광무대의 무대에서 공연됐다. 1915년 결성한 경성구파배우조합(京城舊派俳優組合)과 손잡고 광무대 7주년기념공연으로 새로 선보인 고구려무(高句麗舞)·공막무(公莫舞)·첨수무(尖袖舞) 등으로 관객의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톡청년학생음악단 내한공연(1921), 이시이 바쿠 내한공연(1926), 최승희의 <세레나데> 공연(1927), 배구자의 <아리랑> 공연(1928) 등으로 무용공연 등이 본격적으로 무대에 오르면서 한국의 근대춤이 이 땅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한편 조선후기 대구 관기들의 활동 배경을 살펴보면, 임진왜란(1592-1598) 이후 대구지역에 감영 설치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경주-상주로부터 이어져 온 감영이 옮겨오게 되었다. 곧 1601년(선조34년)에 경상감영이 대구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대구는 경상도의 중심적 거점도시로 변모되면서 많은 국가적 지역적 행사가 많아졌다. 경상감영과 대구부(大邱府)에 소속된 관기(官妓)들의 공적(公的)인 악가무 활동이 활성화 되었던 것이다. 경상도와 관련되는 국가적 행사는 경상감영이 주관하여 이루어졌고, 대구와 관련되는 지역적 행사는 대구부 관아에 소속된 관기들이 도맡아 행사를 치루었다. 당시 경상감영과 대구부는 같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중구 포정동에 위치한 경상감영공원(전 중앙공원) 일대이다. 영조 43년(1736년)에 작성된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에는 경상감영의 부속건물로 교방과 취고수방(吹鼓手房)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1768년에 발간된 『대구읍지大丘邑誌』1)에 의하면, 경상감영 교방(敎坊)에는 41명의 예기(藝妓)가 있었고, 대구부에는 31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또한 1888년에 자인현감 오횡묵(吳宖黙)이 적은 『자인총쇄록(慈仁叢鎖錄)』에 의하면, 경상감영 관하방(觀下房)에는 21명의 기생이 있으며, 대구부에는 17명의 기생이 영영교청(嶺營敎廳)에 소속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당시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아에 소속된 관기들은 악기, 노래, 춤 등 각종기예를 익혀 각종 공적인 연회에서 활동하였던 것이다. 또한 『경상도 읍지』(1832년경),『영남읍지』(1871년경, 1895년)에 대구부의 교방기생 31명과 관노 40명, 대구감영의 교방기생 35명과 관노 81명의 기록이 보인다. 그후 대구기생 향선(香仙)을 비롯한, 남수(藍水), 죽선(竹仙), 화월(花月)이 1908년경에 미국 빅타음반에 취입했음도 확인된다. 이와같은 관기들의 구성이 일제에 의해 1909년 4월부터 실질적으로 관기제도가 폐지(직제상 페지는 1908년) 되자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교방의 관기들은 사회로 진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사회로 진출한 관기들이 중심이 된 모임이 바로 1910년 5월에 결성한 ‘대구기생조합’이다. 또한 1905년 경부선 철로가 개통된 이후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상업성을 가지고 자금을 투자하면서 1922년부터 ‘대구권번’으로 업무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1927년 1월에는 한국인들의 주도로 관기 출신의 염롱산(廉隴山)을 권번장으로 하여 ‘달성권번’이 설립되었다. Ⅲ. 대구지역 근대춤 전승 인맥 대구 근대무용사의 대표적인 인물을 논하라 하면 주로 현대무용의 김상규, 주연희, 김기전, 정순영, 그리고 한국무용의 권명화 외 몇 분을 논하지만, 오늘날의 명맥 및 계승으로 살펴보았을 때 대구지역의 근대무용사의 기점은 대구 출신의 정소산과 전남 나주 출신의 박지홍을 들 수 있겠다. 1. 정소산의 전승인맥: 김수희, 하규일→정소산→백년욱, 최묘정정소산은 대정권번 하규일의 문하생으로 1900년대의 근대무용사의 현장에서 신무용의 거센 바람 속에서 궁중무에 대한 소중한 가치와 전통의 맥을 전승·보존하며 대구 근대무용사 맥을 이어온 선구자이며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다. 대구지역의 한국무용이 발전할 수 있도록 기점을 마련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전혀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정소산에 대한 존재감까지도 잊혀진 채 21세기 현재에 이르렀다. 영남지역의 대구를 중심으로 근대무용사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정소산의 무용활동에 대한 예술사적 평가는 대구 근대무용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으며, 무용의 역사를 되짚어봄과 동시에 미래지향적 예술적 가치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척도가 될 것이며, 기록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춤 인생과 무용사적 가치는 대구지역 근대무용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중요한 가치 척도가 될 것이며, 대구지역의 근대무용사의 다양한 해석이 가능 할 것이다. 조선시대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아 소속의 관기들은 대구지역의 전통음악을 오늘날까지 이어오도록 한 주역들이다. 조선시대 관기들의 구성이 일제에 의해 1909년 4월 경시청의 창기조합조직 명령건이 제정되자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교방의 관기들은 사회로 진출하여 단체를 구성하였다. 이렇게 대구의 관기 출신의 예기들이 주도적으로 1910년 5월 대구기생조합(大邱妓生組合)이라는 명칭으로 단체를 조직하여 명무(名舞) 김수희 조합장을 중심으로 결성하였다. 다만 김소희에 대한 이력사항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어 생년생몰 연대와 춤 경력에 대해 연구가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대구기생조합이 개설되자 김수희 조합장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춤을 배우기 시작한 여섯 살(1910년) 난 어린 소녀가 정소산(본명은 정유색(鄭柳色), 호는 소산(小山), 1904-1978)이었다. 정소산은 1904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아버지 정사운과 상주 정진사댁의 막내딸로 어머니는 약방기생으로 유명했던 박남파 여사 사이의 1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형제들은 모두 비명에 죽었다. 정소산(유색)이도 어릴 적 몸이 약했는데, 기생이 되면 명이 길 운명이란 점장이의 말을 듣고 아버지 몰래 기생을 시키기 위해 춤을 배우게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대구기생조합에서 김수희 조합장의 춤을 배운 후 정소산은 부산의 봉래권번<그림 2>, 수원의 화성재인청 등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17세(1921)에는 서울 대정권번에서 지냈다. 권번별 조합별로 조선의 예기들을 소개한 책 『조선미인보감』(1918)에는 원적과 현주소는 경성부 관철동으로 되어 있지만 경성에 머물던 주소인 것 같고, 원래 출생은 대구 중구 동성로 3가 12번지이다. 『조선미인보감』에 수록한 사진은 입적한지 1년 뒤인 18세 때 찍은 것이다.<그림 1> 원문에 보면 편모슬하의 무남독녀로 형편이 좋지 않아 권번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쁜(좋은) 이마와 발을 가졌으며 청랑한 음성으로 시조잡가를 하는 특징이 소개되고 있으며 부드럽고 착한 성품으로 처음 보아도 구면에 본 것 같고 행동과 말투가 구수하다고 정소산의 인물과 성품이 나와 있는데, 이는 대구지방의 사투리 표현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정소산은 ‘다동조합’이 1918년 ‘대정권번’으로 바뀐(매일신보, 1918.1.27) 뒤 1921년 17세에 대정권번에 입적하여 당대의 명인으로 손꼽힌 인물 하규일(1867-1937)으로부터 1923년 19세에 본격적으로 궁중춤을 배웠는데, 김천흥이 전하는 하규일선생님이 가르친 궁중춤은 춘앵전, 무산향, 포구락, 장생보연지무, 무고, 선유락, 항장무, 가인전목단, 검무, 박접무와 재구성한 사고무, 성택무 등이었고, 여창가곡, 가사, 시조도 지도하였다. 하규일과 다수의 기생들이 1923년 대정권번을 탈퇴하여 그해 8월에 ‘경화권번’을 인수하여 설립한 ‘조선권번’으로 출범한 뒤에는 정소산이 직접 학감(1925년)이 되어 기녀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925년 23세 때에는 조선권번에 있던 대가 한성준(1874-1942)으로부터 승무를 배웠다. 그리고 1926년 이후 고향 대구로 돌아온 정소산은 1931년 3월 경북 예천에서 개최된 ‘예천대발전 신축낙성식 축하음악회’ 전단지로 대구조선정악단 일행이 출연한다는 팜플릿에서 확인된다. 달성권번 기생 신금홍을 비롯하여, 정류색(정소산)·황금주·이난향 등과 예천 기생들의 조연으로 소리와 춤을 공연하였던 것이다. 정소산은 가야금을 비롯한 춘앵무, 포구락 등 궁중정재와 살풀이춤, 승무, 장고, 법무 등을 탁월하게 추었다고 한다. 겨우 가정집 방 하나를 세내어 무용교습소라 차려놓고 가르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처음에는 궁중정재 위주로 가르쳤으나 인기도 없고 수입도 수월치 않아 살풀이춤, 승무, 장고 등도 혼합하여 지도하였다고 한다. 42세(1946)에 처음으로 발표회를 열었고, 46세(1948)에는 하서동에 ‘정소산고전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궁중춤 포구락, 무고, 검무 등의 전승과 보급에 힘썼다. 1969년 포구락, 검무, 무고의 궁중춤이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지정 심사에 오르면서 그의 존재가 대구 지역에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나 심사에서는 탈락했다. 궁중춤 이외에 잘 알려진 정소산류 춤은 ‘수건춤(흥춤)과 ‘달구벌 검무’로 유명하며, 1978년 사망할 때까지 후진 양성에 힘썼다. 한국국악협회 3~5대 경북지부장, 경북 문화상(무용 부문, 1962), 문화공보부장관상, 대통령상 등을 수상했다.<정소산(鄭小山)(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제자로는 그의 며느리였던 최묘정(최복순)과 백년욱, 김기덕, 김해덕, 양영숙, 이윤도, 강명자 등과 타지역 박금술(서울), 이화진(산주), 문소야(익산) 등이 있는데 현재는 백년욱 만이 지역무용계를 지키면서 정소산 춤의 맥을 잇고 있다. 1955년 열 살이 되던 해 정소산의 문하에 들어간 백년욱은 정소산이 타계할 때까지 스승과 함께하면서 정소산의 춤 세계를 체득했으며 2015년 대구시 무형문화제 제18호로 ‘정소산류 수건춤’으로 지정받았다. 정소산의 작품으로는 궁중무용을 중심으로 한 궁중무, 보구락(현재 궁중무용 포구락을 말함.), 무고, 검무, 춘앵무 등이 있으며 민속무로는 소고춤, 장구춤, 바라춤, 농악, 부채춤 외 창작무용으로는 여인의 미, 화랑무, 즉흥무, 조국의 혼, 무영탑, 미선, 꽃보담 내가 예뻐, 낙랑공주, 여인의 예상, 자명고, 단오놀이, 계월향, 낙랑공주, 논개, 직녀성, 원시인의 기상, 흥취 등과 무용극인 구운몽, 논개, 신라의 노처녀 등이 있다. 그의 춤 특징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춤을 추었으며 허리를 굽힌다던지 꼬는 동작들은 없었다는 것은 유장하고 의례적인 궁중정재의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강태홍의 전승인맥: 강태홍→조산월 등 35명1914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예단일백인(藝壇一百人)에 수록된 예인 100인은 주로 서울과 평양 중심으로 조사기록한 것이지만 몇 명 안되는 여타지방 출신 중에는 대구출신으로 조산월(趙山月)<13>, 옥화(玉花)<43>, 향심(香心)<61>, 설경패(薛瓊佩)<74> 등 4명에 대한 개인소개가 수록된 것만 보더라도 대구의 조합이나 권번출신들의 서울진출을 확인해주는 기사라고 볼 수 있다. 이어서 1918년 출간한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아오야나기 고타로(靑柳綱太郞), 지송욱(池松旭) 편저)에는 조선 예기 611명의 화보집인데, 대구조합(大邱組合) 소속 32명(28명 대구출신, 4명은 타지방출신), 김천조합 3명이나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앞서 1914년 매일신보에 기록된 조산월(趙山月)은 중복기록 되어 있어 옥화(玉花), 향심(香心), 설경패(薛瓊佩) 3명을 포함하면 35명의 인물들이 대구출신으로 춤과 가야금병창을 연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구권번의 춤공연 종목은 고무(鼓舞), 승무, 각항(各項)정재무, 검무, 남무 등이었다고 하였다. 당시 가야금과 가야금병창과 춤을 가르친 명인은 전남 무안 출신의 강태홍(姜太弘,1893-1957)으로 1911년(19세) 대구로 이주하여 대구(기생)조합에서 제자를 양성했었다. 이때 1918년 조선미인보감에 수록된 대구조합의 예기 32명중 춤 기예가 기록된 기생은 22명이다. 즉 염옥련(廉玉蓮: 23세, 정재무·남무), 이계화(李桂花: 22세, 검무·남무·각항정재무)와 김옥산(金玉山, 20세, 검무·남무·각항정재무), 도란옥(都蘭玉: 21세, 검무·승무·남무·각항정재무), 상남수(尙南秀: 16세, 검무·승무·남무·각항정재무), 안사운(安斯雲: 20세, 검무·승무·각항정재무, 이점홍(李点紅: 18세, 각항정재무), 권복경(權福璟: 21세, 정재무), 도송옥(都松玉: 18세, 정재무약간(呈才舞若干)·승무), 노소옥(盧小玉: 17세, 승무·정재무), 이도희(李桃姬: 16세, 승무·정재무, 윤월향(尹月香: 18세, 검무·고무(鼓舞)), 백금옥(白錦玉: 14세, 검무·승무), 전무선(全舞仙: 18세, 승무), 강매월(姜梅月: 19세, 검무), 최경란(崔瓊蘭: 15세, 선승무(善僧舞)), 그리고 서운향(徐雲香: 14세), 이계란(李桂蘭: 14세), 백초월(白楚月: 14세), 김산옥(金山玉: 16세), 민봉진(閔鳳珍: 16세), 허경희(許瓊姬: 15세)는 승무 한 종목과 국악종목이 기록되어 있다. 종목별로는 승무가 15명으로 가장 많고, 이어서 정재무 11명, 검무 8명, 남무 5명, 고무 1명 등으로 나타났으며, 정재무는 종목이 다양(50여종)하기 때문에 ‘각항정재무(各項呈才舞)’는 많은 정재무를 출 수 있는 능력자를 뜻하며, ‘정재무약간(呈才舞若干)’은 약간의 정재무를 출 수 있다는 뜻이다. 윤월향의 기록에만 고무를 공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무는 정재종목 중 하나로 윤월향(尹月香)이 여러 정재 중 고무(鼓舞)를 잘 추어서 기예기록에 기록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승무, 병창, 현금(玄琴), 산조, 양금, 가야금 등의 앞에 ‘선(善)’을 붙여 ‘선승무(善僧舞)’ 등으로 표기한 것은 남보다 ‘앞선다’는 뜻으로 우수한 능력자임을 표기한 것이며 ‘특(特)’ 또는 ‘특상(特上)’은 ‘특히 더 잘 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또한 산조(酸調)의 한자표기가 오늘날 ‘산조(散調)’ 표기와 다름도 알 수 있다. 그밖에 김매월(金梅月)·박취옥(朴翠玉)·송홍련(宋紅蓮)·안선옥(安鮮玉)·우달경(禹達卿)·우연화(禹蓮花)·이미화(李美花)·조산월(趙山月)·최금란(崔錦蘭)·허금선(許錦仙) 등 10명은 춤 종목 없는 국악종목으로 가야금, 병창, 산조, 가곡, 현금, 양금, 잡가 등과 정자(正字), 초서(草書) 등의 서예도 기록하였다. 이상과 같이 1914년 대구출신 서울에서 활동한 이는 「예단일백인(藝檀一百人)」에 4명과 1918년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의 대구조합의 32 등 35명의 기녀들의 신상명세와 기예능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을 가르친 스승 강태홍(姜太弘,1893~1957)은 1911년(19세) 대구로 이주하여 대구조합에서 제자를 양성했으며, 그후 잠시 경주권번으로 갔다가 대구조합이 대구권번(大邱券番)으로 바뀐 후에 다시 돌아와 가르치다가 울산권번(蔚山券番)을 거쳐 1939년(47세) 동래권번(東萊券番)으로 떠났다. 당시 권번조직에서 교육을 담당한 지도자는 전국적으로 남자 재인(才人)과 창우(娼優)들이 춤과 소리와 악기사범을 맡아 지도했었다. 간혹 재능이 뛰어나나 나이가 많아 물러난 퇴기(退妓)들이 지도사범으로 나서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관리자 역할을 하였다. 재인들이 지도사범으로 나서게 된 배경은 우선 어려서는 무동(舞童)으로 춤과 소리를 배워 추지만 성장하면서부터는 악사역할로 전환하여 악기연주와 수많은 춤과 소리반주를 하면서 장단변화와 춤동작 전개를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지도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렇게 지도력이 유명해진 재인들은 큰 고을로 모셔가는 것이 많아져 강태홍도 여러 곳의 권번을 거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부산동래에 정착하여 가르친 가야금산조(강태홍류)는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8호(1989, 보유자 신명숙)로 지정되어 전승하고 있으며, 그 때 부산에서 강태홍의 춤을 배운 제자로는 한순서(강태홍류 춤보존회)와 김온경(부산무형문화재 제10호 동래고무 보유자, 1993) 등이 있다. 한순서(1941-)의 증언에 따르면 강태홍은 키가 작으나 흰머리에 변화무쌍하고 재주가 많으며 호쾌하고 멋있게 춤과 연기를 하였다 한다. 그래서 가야금도 다양한 기교로 배웠으며, 춤 역시도 다양하고 활기 넘치고 호쾌하게 춤을 추도록 배웠다. 특히 승무의 북가락은 지금의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났다고 전한다. 한순서로 전승된 승무는 재인계통 승무의 특색인 승복을 벗고 떠나는 결말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살풀이춤은 여인의 한과 감정을 담아서 추는 등 "어떤 춤이 됐던 태마가 있게 추어라”라고 하였으며, "극적인 감정을 살려 추어야지 밋밋하게 추는 것은 멋없는 춤이 된다”라고 지도 하였다고 한다. 그밖에도 춤집이 크고 호쾌한 영남 덧배기가락이 물씬 밴 소고입춤, 장고춤, 바라춤, 화관무, 초립동, 봄타령, 도라지, 꼭두각시 등을 전수받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00년대 초기 대구지역춤을 전승하며 이끌었던 무용인물로는 강태홍을 대표로 꼽을 수 있고 그의 지도를 받은 대구조합과 대구권번의 35명의 기녀들에 대한 자료의 편린(片鱗)이나마 반가운 일이며 아직은 증언자 있어 다행이긴 하다. 하지만 강태홍은 대구를 일직 떠나 전승력을 잃었는지 대구 전승자가 어딘가에 있는지는 조사연구할 시간이 부족하여 알 수 없다. 혹시나 대구에서 근거자료가 나와 주기를 바랄 뿐이다. 3. 박지홍의 전승인맥: 박지홍→ 최희선(달성권번), 권명화(대동권번)근대의 여명기인 1911년에 대구조합과 뒤를 이은 대구권번의 악가무 지도사범으로 초빙되어 지도하던 강태홍이 떠나고 뒤를 이어 1920년대 후반 지도자로 초빙된 이는 전남 나주 출신으로 조선 후기 판소리 명창 박지홍(朴枝洪, 1884,1889?-1958,1959?)이었다. 박지홍은 서편제의 대가 김창환(1854-1939)의 문하에서 소리를 배우고 사촌형님뻘인 박기홍에게 소리 더늠을 이어받으며 수행고수를 하다가 대구로 이주하였다. 건장한 체격에 미남으로 「심청가」와 「흥보가」를 잘하였다. 박귀희(朴貴姬)가 그에게서 판소리와 단가(短歌)를 배웠고, 박초향(朴初香)이 그에게서 소리를 배웠고, 박동진(朴東鎭,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이 「흥보가」를 배웠다. 일제강점기 대구에는 대구기생조합(대구권번), 달성권번과 대동권번 세 곳이 있었다. 1927년 문을 연 달성권번은 대구시 중구 상서동에 소재해 있었고, 해방 후 대동권번은 1940년 전후로 설립되어 대구역 교동시장 근처에 있었다. 이때 달성권번에서 가무를 가르친 사람은 박지홍 외에 채승호(채찬복의 형)가 있었다. 달성권번에서는 춤, 시조, 가곡, 창 등을 공통적으로 익히도록 하였다. 박지홍이 창, 기악, 춤을 지도하였고, 박녹주가 판소리와 춤을 지도했다. 특히 춤에 특출한 기생들은 따로 입춤, 검무, 살풀이춤, 승무 등을 중점적으로 가르쳤다. 대동권번 역시 기본 춤, 시조, 창 등을 공통과목으로 하고 춤으로는 입춤, 살풀이춤, 검무, 승무, 소고춤 등을 가르쳤다. 한편 해방 이후 나주에서 온 살풀이의 대가 박지홍(朴枝洪)에 의해 중구 교동(교동상가백화점 자리)에서 사설 대동권번(이후 남산동에 경북국악원 개설)이 생겨 대구지역에 전통음악교육의 맥을 이어나갔다. 아울러 달성공원 주위와 서문시장 등 사람들이 밀집한 곳에 사설 기생교육단체가 여러 곳 생겨 대구지역 전통음악을 유지하게 되었다. 오늘날 활동하고 있는 대구지역 전통음악예술의 원천은 일제강점기 대구기생조합을 비롯한 대구권번과 달성권번에 소속된 기생들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광복 후 대구의 대동권번에서 ‘기생들의 시험’을 실시하여 뽑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광복 후 두 번째의 기생시험을 1948년 9월에 실시하여 응모자 84명 중 60여 명이 합격되었다고 한다.이와 같이 가무를 하려는 기생이 되려면 이 권번에서 수업을 받아야 했고, 그들이 3년간 수업을 받으면 요정을 출입할 수 있는 허가증을 받았다. 수업과목은 춤·시조·풍류·가야금병창 등이었다. 소리·춤·기악 등 악가무를 동시에 지닌 박기홍에서 박지홍으로 이어지는 달성권번, 대동권번의 춤이 대구지역 권번춤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음은 의미로운 사실이다. 이러한 박지홍 권번 교육은 최희선, 권명화에게 계승되어 현재 대구지역의 대표적인 전통 춤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최희선은 1929년 대구출생(2010.10.12. 작고)으로 10세 후반 명인 박지홍에게 전통춤을 배우며 무용계에 입문하여, 상경하여 1945년 장추화 무용연구소에서 춤을 배우고, 한영숙에게 전통춤 사사하고, 1950년 6.25 전쟁 이후 대구에 내려가 박지홍의 춤을 배우고 청구대학에서 공부하며 무용 활동을 하였다. 예그린악단 무용부장이었던 그녀는 1957년 제 1회 최희선 무용발표회를 시작으로 1958년 청구대학 강당에서, 1959년에는 서울국립극장에서 『승무』, 『부채춤』, 『화랑무』, 『장고춤』 등의 한국무용을 선보였다. 권명화는 1934년 경북 김천출생으로 6.25전쟁 중 피난간 대구에서 절집의 풍악소리에 사로잡혀 영남 최고의 풍류객 박지홍을 만나 1950년부터 사사 받고, 그에게서 배운지 6개월 만에 대구극장에서 열린 무용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1955년 박지홍 고전무용학원 강사가 되었다. 일제의 관할에 있었던 만큼 크게 번성하였던 달성권번은 해방이 되면서 곧바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대동권번은 해방 후에도 얼마간 존속되어 오다가 1950년 화재로 인해 없어졌다고 전한다. 박지홍이 운영하는 대동권번은 그해 남산동 포구당(포교당) 폐기된 절을 기녀와 회원들이 모은 돈으로 임대하여 ‘경북국악원’이라는 이름으로 권번의 역할을 대신하였는데 이때 김천에서 6·25한국동란으로 피난해온 권명화 가족이 피난하여 세든 집이 박지홍의 경북국악원 이웃집이어서 담너머로 연습하는 악가무를 보고 따라 흉내 내다가 용기를 내어 직접 찾아가 입회를 하여 전수를 받았다. 권명화가 전승하고 있는 춤은 승무, 살풀이춤(대구시무형문화재 제9호), 입춤, 소고춤, 검무 등과 경산자인단오제(국가무형문화재 제44호)의 여원무를 비롯하여 단오굿 일곱거리의 부정굿춤, 산신축원굿춤, 천왕굿춤, 칠성굿춤, 대감굿춤, 장군굿춤, 대신굿춤, 해원굿춤이 있고, 축원춤으로 산거리춤(방울과 부채), 지전춤, 선비춤(한량무), 바라춤, 선녀춤, 오방신장춤, 장군칼춤 등이 있으며 건들바위 치성굿’도 복원하여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1991년, 여수)에 출품한 적도 있다. 일제강점기 대구지역의 무대 예능화 된 전통춤은 박지홍을 정점으로 한 달성권번, 대동권번 등 두 개의 권번을 통해 전승되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한말 궁중 여령춤을 계승하고 있는 정소산(1898-1975)으로 그 맥이 이어져왔다. 따라서 권번이나 기생을 제외하고는 대구지역 전통춤의 역사적 맥락을 말하기란 어렵다. 박지홍은 대구에서 계속 연구소를 운영하였는데, 1958년 제1회 전국 민속경연대회에 경북 대표로 참가하여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제1회 민속경연대회에 참가하여 공연한 작품은 쾌지나칭칭나네, 하회별신굿, 경산옹헤야, 함창모내기놀이, 안동놋다리였다. 당시의 출연진은 신장대에 박지홍, 먹중과 분네에 최희선, 초랭이에 김경자, 양반에 채승호, 선비에 채찬복 등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그 당시의 제일 극장에서 앵콜 공연을 준비하다가 장구채를 잡은 채로 과로로 쓰러져 며칠간 혼수상태로 사경을 헤매다 마침내 운명하였다. 이 시기의 대구의 전통춤은 기방춤으로 일컬어지는 박지홍류와 궁중무인 정소산류로 크게 대별됨을 알 수 있다.4. 김상규의 전승인맥: 김상규→최영자, 이숙재, 주연희, 서진은 등 대구에서 현대무용이 시작된 시기는 1930년대로 볼 수 있다. 일본의 현대무용 개척자인 이시이바쿠(石井幕)는 우리나라에서도 현대무용의 씨앗을 뿌린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시이 뒤를 이어서 최승희, 조택원, 조용자, 김상규, 김한일, 장추화, 박용호 등 많은 한국의 무용가들이 활약하였다. 대구에서의 현대무용 공연은 1935년 최승희가 대구 공회당에서 한 것이 효시였고, 1936년에 조택원이 같은 장소에서 도불(渡佛)고별공연을 한 것이 그 다음이었다. 중국에서 일본군을 위문하기 위한 공연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던 이시이가 귀국도중 대구에 들러 1944년 7월 하순에 대구 공회당에서 공연을 하였다. 같은 해 최승희와 조택원도 대구공회당에서 무용공연을 가졌으며, 8.15광복 직전에 이시이의 문하생 조용자도 대구 공회당에서 발표를 가진 바 있다. 그는 1947년 현재의 대봉동 전신전화국 자리에 대구 최초로 무용연구소를 차려 활동하였다. 해방 된 이듬해인 1946년에는 발레를 전공한 한동인과 정지수가 키네마에서 공연을 했고, 그 해 가을 장추화, 이석예도 발표회를 가졌다. 1947년에는 이시이 문하생인 박용호와 조용자의 무용공연이 만경관과 키네마에서 있었다. 또한 경북여고를 졸업한 뒤에 신성무용소를 열어 후학을 지도 한 김선화가 키네마에서 공연을 하였으며, 대구여중 무용교사였던 하복조와 경북여고 무용교사였던 주연희가 찬조출연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지금의 대구 현대무용을 존속케 하는 역사적 효시에는 김상규(金湘圭, 예명 技波, 1922-1989)가 있었다. 김상규는 1922년 5월 25일, 경북 군위군 군위면 금구동 134번지에서 안동 김씨 집안의 부농한 아버지 김병호(金怲鎬)와 어머니 정직영(鄭稷英)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상규는 누나인 김무숙이 태어나고 5년 만에 낳은 자식이어서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어릴 때부터 춤추는 것을 좋아했으며 한 번은 엿장수가 "엿 사시오?”하며 가위를 "쨍강쨍강” 치자 동생(상규)이 "거기에 맞춰 춤추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누나 김무숙이 말하였다. 또 마을에 남사당패 거리나 서커스단의 공연이 오면 하루도 빠짐없이 구경하며, 이들이 떠날 때면 동네 어귀 멀리까지 따라가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성대다가 울면서 돌아오곤 했다고 한다. 그 당시 김상규의 마음속 우상은 연희패들이었고 자신도 언젠가는 이들과 같은 연희패가 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대구로 유학하여 수창초등학교를 다닐 당시 1931년 9월16일 대구극장에서 공연한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공연을 보면서부터 무용에 열정을 불태우기 위해 법학공부해서 판검사 돼서 오겠다고 핑계를 대고 14세(1935)에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와세다중학교를 다니면서 저녁에 이시이바쿠 연구소에 가서 신무용을 배웠으며, 동경전기학교(현 대학승격)를 졸업한 뒤 1941년 와세다대학 문학부와 1943년 동경음악과를 수학해 다방면의 관심을 보여주었고, 1946년 10년의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예능분야에 뛰어난 김상규는 영화, 연극, 음악, 회화부문까지 다방면에 재능이 있어 골고루 습득하였다. 농촌의 자연미와 순박성, 넉넉함의 감수성은 무용가로 활동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여성들도 사회적 인식을 깨기 힘든 시절에 남성무용수로 향토 대구의 현대무용을 개척하고 뿌리 내리게 한 선구자로 평가할 수 있다. 김상규는 조택원, 최승희, 이시이 등의 공연을 보고 무용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해 판검사가 되기를 원하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가 이시이 문하에서 다년간 수련을 하고, 대구로 돌아와 신무용 보급을 한 인물이었다. 1945년 8.15광복이후 정치적 혼란기를 거친 다음 대구무용계도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김상규는 1946년 귀국 후 바로 신무용연구소를 개소하였고, 1949년 자신의 무용단을 창단하고 만경관에서 가진 그의 ‘김상규 신무용 발표회’라는 타이틀의 첫 발표회에는 최희선, 최미연, 박근숙 등 20여 명이 출연하였으며, 이는 대구지역에서 자생한 신무용의 첫 보급이라 할 수 있겠다. 1950년 7월에는 6·25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문총구국대가 결성되어 김상규가 무용분과위원장으로 선임되었으며 이 무렵 문하생으로는 김화심, 최영자, 문명희, 이빈화, 박득남, 김경자, 주연희, 박득순, 장성자, 박근숙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얼마 후 문총구국대 경북지대는 해체되고 1951년 12월 19일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경북지부가 발족되었으며, 무용위원장은 김상규가 맡았다. 1951년부터 김상규 무용발표회가 국립극장(키네마극장, 현 한일극장, 전쟁 중에 중앙국립극장이 대구로 옮겨짐)에서 자주 열렸고, 이때의 출연자들로는 이월영, 최미연, 이빈화, 최영자, 한순옥, 장일, 문영희, 백운향, 박득남, 박득순 등이 있었고, 김경자, 이숙재, 백년욱 등이 어린나이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김상규는 전쟁이라는 혼란과 모든 공연운영비를 자신이 부담해야 하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1952년 4월 14일에서 15일(오후 1시, 7시)까지 대구문화극장에서 제2회 김상규 신무용발표회를 가졌으며, 휴전될 무렵인 1953년 6월 4일에서 6일(오후 1시,3시 30분,7시)까지는 전쟁 때문에 대구로 무대를 옮겼던 중앙국립극장(현 한일극장)에서 제3회 김상규 신무용발표회를 했다. 뚜렷한 연습장 하나 없이 초․중․고등학교 강당이나 창고, 업무가 끝난 사무실 또는 옥상 등을 이용하여 연습하였으며 미제 내의를 검정으로 물들여 연습복으로 입고, 제대로 된 무용화 없이 맨발로 시멘트 바닥에서 피가 나도록 연습하였다. 그리고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연습과정을 거친 후 공연을 하기 위해서 모든 운영비(의상비, 무용수들과 악사들의 숙식비, 조명비 등)를 개인이 책임졌기 때문에 많은 관중이 몰려 들었음에도 그 경비를 충당하기 어려워 무용가와 무용가를 둔 집안은 가산을 탕진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 김상규도 예외는 아니었다. 작품 발표회를 해마다 열다 보니 논밭을 팔게 되고 결국은 집까지 팔게 되어 셋방으로 전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생활형편은 어려워도 대구에서 인정받는 향토계의 춤꾼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대구에서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남성무용수로 작품세계는 끝없이 폭을 넓혔으며, 자신의 의지대로 춤을 사랑하고 향토계에 예술세계의 밑거름이 되도록 터전을 닦았다. 1956년 이후의 대구무용계는 여전히 김상규의 독무대였다. 김상규는 1951년 제1회 김상규 무용발표회를 가진 이후 1955년 제5회, 1957년 제 6회 무용발표회를 가졌다. 김상규 문하생이었던 김상아, 구숙자, 주연희, 장성자, 서차애 등이 키네마에서 열린 제 6회 김상규 무용발표회에 출연하였다. 개인발표회가 없었던 1956년에도 경북예술제에 찬조출연하여 『아뜨리에의 환상』, 『성당의 아침』등 화려한 무용의 향연을 베풀었다. 김상규는 무용인으로는 처음으로 1957년도 경상북도 문화상을 수상하였고, 혈육으로는 대구 가톨릭대 무용학과 교수 김소라가 있으며, 1989년 작고할 때까지 100여편의 작품을 안무하였다. 손꼽히는 제자로는 최영자, 백운향, 박덕남, 박덕순, 백년욱, 이숙재, 김상아, 주연희, 서진은, 장성자, 오애리, 정선자, 김예숙, 이명주, 박성실, 김미연 등이 있다. 김상규의 작품세계는 첫째, 자신의 삶과 주변을 투영시켜 만든 작품으로는 「동심」,「처녀총각」,「애기와 어른」,「형제」,「명상」,「봄노리」,「젊은 날의 추억」,「봄처녀」,「파동」,「새싹」,「무영탑」,「파랑새」,「악몽」,「마음의 생태」,「망상」,「환희」,「월야」,「춘일서정」,「휴식의 환각」,「길손」,「목선」,「소녀시절」,「사의 유혹」,「화염」,「희망의 언덕」,「들국화 피는 시절」,「나그네」,「잃어버린 마음」,「가면무」,「고혼」,「애상곡」,「사슬을 끊고」,「가을의 회상시곡」,「의용」,「가로등」,「건망증」,「완행열차」,「기억을 기다리는 거울」,「은방울」,「초원의 동심」,「지평선」,「개구리의 합창」,「산소결핍」,「고목의 노래」,「수련」,「원색의 회량」,「가면의 생태」,「장미의 꿈」,「푸른 언덕」,「타임」,「작품B」 등이 있고, 둘째, 우리 전통적인 문화와 겨레의 민족성을 다룬 작품으로는 「활양」,「아리랑 삼조」,「황진이」,「향토의 인상」,「태공망」,「살풀이舞」,「건설」,「전설의 환상」,「마음의 생태」,「힘」,「호걸무인」,「검무」,「희생」,「기원」,「유상무상」,「순국의 처녀」,「백홍」,「타령조」,「산소결핍」,「이 흙이 있는 한 절망은 없다」,「수련」,「민족의 흥」,「전진」,「회귀」,「산하」등이 있으며, 셋째, 삶 자체를 불교에 의지해 온 평소의 모습과 심오한 종교관과 사상을 다룬 작품으로는,「창조의 신」,「정불국토」,「무영탑」,「기원」,「유상무상」,「탈속」,「남방의 서정」,「성당의 아침」,「재생」,「아잔타의 꿈」,「관음보살」,「보리수」,「생명의 향연」,「휘데아스의 꿈」,「니르바나」,「원색의 회량」,「간다라의 벽화」,「정각」등 1949년부터 1976년까지 13회에 걸쳐 100여 편을 발표하였다. 그가 30년 이상을 향토 무용계에 독보적으로 활동하다 보니 주변의 시선에 어려운 점도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무용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은 시절부터 여성도 아닌 남성이 무용계에 뛰어들어 지역무용계에 토양을 이루어 낸 공은 인정받아야 할 일임에 분명하다. 5. 정막(정순영)과 김기전의 전승인맥 김상규와 별도로 대구 현대무용의 역사에 빠져서는 안 될 인물로는 정막(鄭漠, 본명 鄭淳永, 1928-2012)과 김기전(金起田, 1935-) 부부를 들 수 있다. 이들은 1950년 무용교육에 뜻을 두고 원화여고에서 정막 무용연구소로 출발했다고 언급한다. 정막은 1947년 겨울, 서울 명동의 문교부 인가 함귀봉이 설립한 조선 교육 무용연구소에 첫 발을 디딘 것이 무용예술의 입문이었고, 6.25사변을 통해 무용과 더욱 깊은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현학선이 1953년 부산극장 종군극작가단 신작무대에 <인어의 정설>로 출연하고, 그해 8·15경축무용제에 중앙국립극장(전쟁으로 대구이전)에서 송범, 김진걸, 이인범과 함께 출연하였다. 그리고 1954년에 중앙국립극장(대구)에서 정막의 안무로 제1회 개인발표회를 가졌다. 김기전은 1935년 동경에서 태어나 1940년 여섯살 때 고향인 함경남도로 돌아갔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부산으로 피난 가서 경남여고와 부산대에서 공부하고 경기여대를 수료했다. 어린 시절부터 무용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발표회 무대에 자주 섰다. 피난시절 이인범발레연구소에서 공부하고 1952년 임천수 국보오페라단에 1954년까지 단원으로 활동했다. 1954년 7월 육군 군예대(KAS)에서 무용 활동을 시작하였다. "초․중․고등학교 강당이나 창고, 업무가 끝난 사무실 등을 이용하여 연습을 했고, 미제 내의를 검정색으로 물들여 입고 다시 변형시켜 한번 더 입고, 3번은 활용했다.”며 당시의 열악했던 연습과정을 피력하고 있다. 1958년 12월에는 경북무용협회가 결성되어 키네마에서 창립공연을 하였는데, 정소산, 정막, 최희선, 현학선, 박금슬, 문소조 등이 출연하였다. 이 단체는 경북문화단체 총 연합회로 흡수되었다. 현학선도 이때 처녀무용발표회를 가져 향토무용계를 고무시켰다. 1961년 대구바레아카데미를 창설하고 부인 김기전과 대구지역에서 현대춤과 발레를 교습하여 춤인재를 양성하였다. 김기전은 국내 최초로 대구시립현대무용단을 설립하여 초대(1981~1988년) 안무자로 대구 현대무용계를 직업무용단으로 이끌어왔다. 정막은 춤 실연자이자 춤 연출자, 안무가로서, 그리고 춤 교육자, 이론가, 평론가로서 대구, 경북지역 춤문화의 구심체였다. 2000년에 이르러 (사)대구시민문화연구소를 차려 대구지역 춤문화를 비롯하여 시민문화 향상에 매진해온 일은 중앙중심의 무용편중에 대한 대항마이기도 하였다. 그 당시에는 무용공연에 관계되는 모든 운영비(의상비, 무용수들과 악사들의 숙식비, 조명비등)를 개인이 책임졌기 때문에 많은 관객이 몰려들었으나 그 경비를 충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따라서 재정적 손해를 감수해야만 하는 실정이었다. 춤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무용가들이 세인의 눈총을 받으며 춤을 춘 배고픔 속에서도 민족혼을 고취시키고 춤 예술의 지평을 여는 창작 무용들을 계속 발표하였기 때문에 예술가로서 인정받는 좋은 환경의 무용세계를 후배 무용가들에게 물려주게 된 계기가 마련된 게 아닌가 생각된다. Ⅳ. 결언- 근대전기 대구지역춤의 인맥적 특징과 의의 근대의 여명기라 할 수 있는 1960년 이전 대구지역춤의 전승인맥을 고찰하면서 살펴본 대구춤의 문화사적 가치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정소산, 강태홍, 박지홍, 김상규 등 춤 명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대구지역춤을 발전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하여‘춤의 고장을 수립’하였다. 대구인들의 뛰어난 적응력과 강인한 개척정신은 근대 혼돈의 역사 속에서도 대구의 전통적 춤기반을 이어받아 전승하였고 새로운 현대춤도 정착시켜나갔다. 2) 각자 독자적인 춤정신과 다양한 춤방식으로 대구춤을 범한국적이고 세계적인‘안무도시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대구지역 전통춤의 자체전승을 비롯하여 타지역춤의 유입전승, 궁중춤을 민속춤으로 이동한 계층전승, 외래전승, 창조전승 등의 각자 다양한 전승원리를 내포하고 있었다. 대구지역 전통춤(교방 및 기방춤, 민간춤, 종교의식춤)을 꾸준히 계승한 자체전승을 비롯하여, 타지방무용인(박지홍, 강태홍)들을 초청하여 대구 전통춤으로 정착시킨 유입전승, 수준높은 궁중춤을 대구민속춤으로 정착(정소산)시킨 계층전승, 국제무대로 진출하여 현대춤을 세계적인 현대춤 도시(김상규)로 도약시킨 외래전승, 근현대 무용가들의 창작정신으로 대구현대춤(김상규, 정막, 김기전)을 발전시킨 창조정신 등으로 대구춤계를 주도하였으며 후대에 대구출신 무용가들이 경향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다. 3) 대구감영과 대구부 예기(藝妓)들의 뿌리깊은 교방춤과 전통춤 등‘역사춤의 혈통 계승’으로 근대춤 형성에 직간접적으로 이바지하였다.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1736)(1768),『경상도읍지』(1832년경),『영남읍지』(1871년경, 1895년)에 보이는 대구예기들의 교방춤과 1908년경에 미국 빅타음반에 취입까지 이어진 예기들의 후예의 피가 흐르고 있다. 4) 6·25동란으로 북한지방과 수도권 피난민이 대구로 집결하였고 임시 중앙국립극장 설립으로 ‘춤공연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당대 최고급 명무공연과 춤인적 교류가 활발하였다. 5) 대구지역춤에는 영남춤의 보편적 특징, 영남북부춤의 중심적 특징, 대구의 향토춤의 특징을 고루 갖추고 ‘영남춤의 요람(메카)’으로 발돋음하였다. 민간전승의 민속춤은 오랜 역사속에 뿌리내리며 정착된 전통문화이기에 생태적으로 영남권춤의 보편성을 지니고 있으며, 더불어 영남북부권의 거점도시로 영남남부와 다른 영남북부권춤의 특성도 지니고, 대구만의 향토춤도 여전히 전승되어 왔다.결국 대구는 근원적으로 한국전통춤 중에서 광역적인 영남춤의 성향을 지니면서 대구만의 지역민속춤의 특색을 발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일제강점과 서구문화의 홍수와 6·25 한국동란으로 인한 대구집중화 현상 등 급변하는 역사와 사회환경의 변화에 따라 대구지역춤은 지역화, 탈지역화, 범한국화, 중심화, 국제화 등으로 중앙무대와의 교류가 활달하게 전개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20세기 근대전기의 대구춤의 문화사적 가치나 의의를 발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남는 것도 있다. 물론 한국근대사의 범국가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1960년 이전의 한국사회는 근대춤의 ‘여명기’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혼란기’이며 ‘전란기’이기에 서세동점(西勢東漸)으로 전통문화의 ‘쇠퇴기’이며 외래문화의 ‘범람기’의 시련을 겪었다. 따라서 대구춤 역시 비켜갈 수 없는 운명으로 현란했던 관아의 교방춤과 권번춤은 역사의 뒤안길(박지홍, 정소산)로 접어들어 몇몇 춤꾼(최희선, 권명화, 백년욱 등)과 몇 가지 춤만이 명맥을 잇고 있는 실정이었다. 시대조류에 따라 한국춤은 전통춤과 창작춤을 동시에 표현하는 어려움에서도 꿋꿋이 맥(백년욱, 주연희 등)을 이어 왔다. 현대춤과 발레는 대구(김상규, 최원경, 김기전, 구본숙)는 물론 서울 등지로 진출(이숙재, 김복희, 박인숙, 백현순, 이화석, 김용철, 손윤숙)하여‘춤의 고장’의 토양에서 성장하여 대구출신다운 유명 무용가들도 많은 점 또한 이를 반증하는 것들이다. 이제 많은 중견무용가들(박연진, 임혜자, 이정일, 김현옥, 장유경, 김희숙, 박현옥, 김소라, 강정선, 김죽엽, 최두혁, 오레지나, 채명)과 수많은 신진무용가들(김순주, 김나영, 김명란, 김현태, 김희경, 노진환, 박미향, 박정희, 박종수, 변인숙, 안지혜, 우혜영, 유연아, 이경화, 이수연, 이승대, 장 오, 장현희, 장혜린, 전효진, 조은희, 최석민, 최윤영, 추현주, 편봉하)등이 대를 이어 대구춤의 정신과 전성기를 향해 매진하고 있어 밝은 미래를 예견하고 있다고 본다.(대구세계안무페스티벌 세미나에서 발제된 원고) ) 참고문헌 계명대 한국학연구소(2011). 영남의 지역예술연구.金宅圭·朴大鉉 編譯(1997). 大丘邑誌, 대구광역시.김영희(2006). 개화기대중예술의 꽃, 기생, 민속원.김죽엽(2010). 정소산의 작품활동을 통한 무용사적 고찰: 대구활동을 중심으로, 영남 악가무 재조명, 서울:한국국악학회.김죽엽(2011), 대구 근대무용사의 선구자 정소산의 정재가 대구무용사에 끼친 영향, 음악문헌학, Vol.- No.2, 한국음악문헌학회.김죽엽(2013). 대구 근대무용사의 선구자 정소산의 존재적 가치인식론, 한국무용학회 13권 2호.김채현·김영희·이종숙·김채원·조경아(2015,). 한국춤통사, 보고사.김천흥(2005). 우리춤이야기, 민속원.노동은(1995). 한국근대음악사1, 한길사.대구시사편찬위원회(1995). 대구시사. 대구시.대구예총(2012). 대구예총50년사. 대구: 동연합회.박민우(2013), 김상규 생애를 통한 무용사적 고찰,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석사학위 논문.박성실(1997), 韓國近代舞踊史에 나타난 金湘圭의 춤 硏究 : 敎育者的 成長科程을 中心으로, 中央大學校 大學院.박연진·장유경(1993). 대구 한국무용 30년사, 한국무용연구 11집, 한국무용연구회.박연진·장유경(1993). 대구예술 삼십년사. 대구: 대구예총.박황(1974). 판소리소사. 신구문화사.배연형(2011). 한국유성기음반 : 1907-1945, 권5. 한걸음 더.손태룡(2001). 每日申報音樂記事總索引:1910.5.30.-1945.8.15. 民俗苑.손태룡(2005). 달성권번의 음악사학적 조명, 향토문화 제20 특집호, 대구향토문화연구소.손태룡(2012). 대구지역의 기생단체 연구, 한국학논집 46,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송기영(2011). 정소산의 예술 활동이 대구 근대 무용사에 끼친 영향, 모드니 예술 5집, 한국문화예술교육학회.송방송(2003). 京城放送局에 출연한 藝妓의 공연활동, 한국근대음악사연구, 민속원.송방송(2007). 증보한국음악통사, 서울: 민속원.宋芳松(2012). 한겨레음악인대사전, 서울: 보고사.송방송·이진원(2007).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 민속원.안제승(1984). 한국신무용사, 승리문화사.윤미라(2000). 대구 달구벌 입춤의 전승과 변형에 관한 연구, 대한무용학회 제28호.윤현숙(2007). 대구지역 무용의 흐름에 관한 연구,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이규리(2004). 朝鮮後期 外方官妓 硏究,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이병옥(2011). 영남춤의 생태민속학적 고찰, 한국무용연구, 29권 2호, 한국무용연구학회,이병옥(2013). 한국 전통춤의 분류와 양식적 특징: 정병호의 분류법 검토를 중심으로, 공연문화연구 27권.이숙영(1995). 지역문화 예술로서 현대무용의 활성화 방안 : 광주,대구,부산 지역 공연관람자를 중심으로. 조선대학교 석사학위논문.이숙재(1999). 技波 金湘圭 삶과 예술, 그리고 작품세계의 재조명, 한국 근대춤 인물사(1), 송수남 엮음, 현대미학사.이은주(2007). 춤 33인, 푸른미디어.정순영(2013). 대구춤 60년사, 사단법인 다다.주연희·구본숙(1993). 대구예술 삼십년사. 대구: 대구예총.채명·박정희(2010). 춤신을 만나다 권명화, 대구동구팔공문화원.채희완(2013). 춤창작과 비평에 예술공학 시스템을 도입함, 대구춤 60년사, 정순영 저, 사단법인 다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1998). 한국유성기음반총목록. 민속원.錄音文獻學會(昭和11). レコド文化發達史.<광무대(光武臺)>(한겨레음악대사전, 2012.11.2. 도서출판 보고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948646&cid=42607&categoryId=42607.<한국근대의 음악원형>(http://music.culturecontent.com) 참조.<다동기생조합(茶洞妓生組合)>(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대정권번(大正券番)>(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지방의 권번>(기생 이야기-일제시대의 대중스타, 2007. 7. 5, ㈜살림출판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387073&cid=42967&categoryId=42967.<조선 기생>, 연예인이 되다 – 역사채널e 2016.06.14. http://blog.naver.com/eunayoon715/220725445504.『매일신문』. 1958.8.10.『동아일보』. 1958.8.13.『매일신문』. 1958.8.9., 9.1.『매일신보』. 1972.11. 16.『매일신보』. 1914.1.28.-6.11.『대구시보』. 1948.9.23.월간 대구문화. 2007.4월호.이생강 면담, 2013, 면담자: 김죽엽.한순서 전화면담, 2016.7.13. 면담자 : 이병옥.한순서 면담, 2010~2013, 장소: 강태홍춤연구소, 면담자: 이병옥.권명화 전화면담, 2016.7.16.~18(3회), 면담자: 이병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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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1962년 박정희 의장, 아리랑 등 수집 지시 자료1962년 4월 15일부터 5월 31까지 경복궁 내에서 개최된 산업박람회 현장 순시 중이던 박정희 의장이 국악인과 음악가 성경린, 나운영, 김동진 등에게 민속음악 100곡, 그 중에 ‘아리랑’을 수집하라는 지시를 했다는 기록이 있는 한 유생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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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09) <br>청자상감갈대문매병편평소 차곡차곡 쌓아두는 습관이 이규진(편고재 주인) 바라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근래 갑자기 이 생각을 떠올린 것은 한 장의 사진 때문이었다. 흑백인 이 사진 속에는 많은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한 여성이 보인다. 그런데 이 여성의 자태와 표정이 재미있다. 가슴을 풀어헤쳐 들어난 젖을 아이가 열심히 빨고 있는 가운데 여성은 이 상황은 잊어버린 채 무언가에 도취된 듯 어딘가를 열심히 바라보고 있다. 여성뿐이 아니라 둘러싸고 있는 여자들 또한 마찬 가지다. 이 모두의 시선이 약간 위쪽을 향한 것으로 보아 아래를 굽어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연단 위의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고 하면 그 대상은 무엇일까. 사진과 함께 이 것이 실린 사진집도 함께 구했는데 70년대에 발행된 것이다. 따라서 사진은 설명이 없지만 60년대나 70년대에 찍은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 시기는 이른 바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했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 때의 중요한 선거라면 박정희와 윤보선, 박정희와 김대중이 맛 붙었던 대통령 선거를 들 수 있다. 사진은 그 중 어떤 선거에서 유세 장면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선거란 나와 내 미래에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고 보면 아무리 정치와 무관한 일반 민초라 해도 관심이 안 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젖을 빠는 아이 자체를 잊어버린 채 어떤 대상에 대해 넋을 잃고 몰두하고 있는 여성의 표정은 무척 재미가 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보자. 바라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미학적 감각이라는 것이 있다. 예술작품을 통해 미적 경험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데 이는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 그 안에 담긴 아름다움과 조화를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 것은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대상을 인지할 수 있는 내 안의 지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상은 결국 내 안의 경험이나 지식과 감응해 일어나는 현상이지 맹목적으로 누구에게나 똑 같이 보이는 것이 아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결국은 이러한 사실들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과 더불어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법정 스님이 하루는 해인사 계단을 오르고 있는데 경판각에서 방금 나온 어떤 여인이 내려오고 있었다. 그 여인이 스님에게 물었다. 팔만대장경이 어디에 있느냐고. 방금 보고 나오지 않았느냐고 하자 여인이 말했다. 아, 빨래판 말인가요? 팔만대장경에 대한 경험이나 지식이 없다면 결국 그 것은 빨래판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이 일화에서처럼 실감나는 경우가 어디에 또 있으랴. 청자상감갈대문매병편은 굽과 몸체 일부만 남아 있는 도편이다. 밖으로 벌어진 굽 위에 연판문을 흑백으로 새기고 백상감으로 구분한 선 위 몸체에는 흑백으로 갈대와 꽃을 새겨 넣고 있다. 약간 엉성한 무늬로 보아 14세기 전반 것으로 보이는데 따라서 주구는 전성기의 반구형이 아니라 밖으로 벌어진 입술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입술에서 어깨로 벌어졌던 몸체는 S 곡선을 그리며 굽으로 이어지는 형태였을 것이다. 유색은 불을 받은 영향에 따라 비색과 청갈색이 섞여 있다. 세로로 길쭉한 형태의 매병은 아무래도 시선을 아래다 두는 것보다는 위에다 놓고 보는 것이 더 감상의 포인트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 청자상감갈대문매병편 또한 마찬 가지다. 그런데 기존의 형태가 마음속에 들어 있는 것이 없다면 이 매병편은 어떻게 보일까. 도편에 불과한 이 것이 과연 매병으로 보일까. 푸르딩딩한데다 희고 거뭇거뭇한 문양이 들어간 이 것을 보았다면 팔만대장경을 빨래판이라고 했던 여인은 무엇이라고 했을까. 일거에 사금파리나 사기조각이네 라고 치부하지는 않았을까. 그렇게 부른다고 해서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무언가 빈구석이 있는 듯 서운하고 아쉽지 않은가. 따라서 우리는 도자기를 제대로 알고 보기 위해서라도 우리 마음속에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평소 차곡차곡 쌓아 두는 습관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바라본다는 것은, 그리고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은 결국 무심한 경지에서 그 무엇을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닌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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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박정희 아리랑’, 혁명일기 속의 아리랑우리나라 모든 대통령은 아리랑 사연을 갖고 있다. 이 중에 박정희대통령은 울림이 큰 아리랑 사연을 갖고 있다. 물론 육영수여사와 관련한 사연도 마찬가지다.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해’라는 무거운 제목의 이 책 속에도 아리랑 사연이 담겨있다. 캐나다 기자 마이클 키온이 인터뷰를 통해 엮은 책이다. 이 속에 혁명기 일기에 아리랑을 언급하고 있음을 다뤘다. 아리랑 사연은 끝이 없음을 알게 하는 자료이다. 이 표제는 1974년 휘호를 통해 알려진 것인데, 최근 이를 주제로 뮤지컬이 만들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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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106)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저 유명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다. 이미자는 1964년 이 노래를 불러 일약 국민가수로 등극하게 된다. 역사상 처음으로 100만장이 넘는 음반을 판매한다. 한산도(한종명) 작사, 백영호 작곡, 하지만 왜색풍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금지곡으로 묶이게 된다.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라는 가사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붉은색만 보면 경기를 일으키던 시대였기 때문일까. 하지만 전문 연구자들에 의하면 왜색이나 빨갱이라는 배경 보다는 박정희정권의 '한일국교정상화'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고육책이었다고 한다. 한일수교 반대, 저자세 외교논란을 미연에 차단했다고나 할까. 이 노래는 우여곡절을 거쳐 1987년 6월 항쟁 이후 해금된다. 왜색의 혐의를 입었던 것은 트로트 자체에 대한 이율배반이랄까, 뽕짝은 무조건 요나누키 음계이고 일본의 것이라고 폄하했던 시대적 풍조가 한몫을 했다. 민요 등 전통음악의 쇠잔, 트로트와 가요의 병존, 급속한 산업화, 농촌인구의 와해 등 상황들이 얽히고설킨 시대이기도 했다. 이즈음 트렌드이기도 한 트로트 열풍을 보면 일종의 격세지감을 느낀다. 트로트에 대한 시선 자체가 염세나 비관, 저급이나 신파의 정조를 뛰어 넘은지 오래다. 동박새가 꿀물 날라다주어야 비로소 피는 꽃 '동백아가씨'는 남해안 혹은 섬지역을 중심으로 상징화되어 있는 동백꽃을 아가씨에 대입한 것이다. 하지만 동백에 대한 전통적 시선은 비관과 좌절, 애수와 연민 보다는 오히려 고결과 숭고, 절개와 지조 같은 이미지가 강하다. 민화(民畵)나 묵화(墨畫) 특히 화조도(花鳥圖)의 소재 중 하나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춘수가 그랬다. 이름을 불러주어 비로소 꽃이 되었다고. 아무리 아름다운 대상일지라도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지극한 고백 아닌가. 한걸음 나아가 동백은 새가 날라다주어야 비로소 피는 꽃이다. 그래서 조매화(鳥媒花)다. 북한에서는 '새나름꽃'이라 한다. 새에 의해 꽃가루가 매개되는 꽃이라는 뜻이다. 동백꽃의 꿀을 빨아먹는 동박새가 꽃가루 옮겨주는 기능을 한다. 동박새는 동백꽃의 꿀을 먹고 살고 동백꽃은 동박새가 꿀을 옮겨주어야 수정을 한다. 그래서 '동백새'라고도 한다. 동박새는 한국, 일본 등지를 중심으로 아시아 전역에 분포하는 텃새이다. 섬이나 연안 등지 동백숲에서 살기에 울릉도나 제주도, 서남해 섬지역에서 볼 수 있다. 몸의 길이는 11cm정도, 등은 연한 녹색인데 날개와 꽁지는 녹갈색이다. 배는 흰색이고 눈 가장자리가 은색의 흰고리 모양이다. 동백꽃의 꿀을 좋아하여 식물성 꿀과 열매를 먹는다. 또 에벌레나 거미, 곤충류 등의 동물성 먹이를 먹고 산다.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가 공생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기는 했지만 동백꽃과 동박새의 관계는 명실상부한 공생이다. 옆구리에 붉은색을 띠고 있는 동박새를 김치자국이라 표현하는 이들도 있다. 애수와 비련에서 휴머니즘과 고결까지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어느 나라에 포악한 왕이 살았다. 자식이 없어 자리를 물려줄 수 없었기에 동생의 두 아들이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욕심 많은 왕은 그것이 싫어서 조카들을 죽일 궁리를 하였다. 동생이 이를 알고 아들들을 멀리 피신시켰지만 이내 들켜버리고 말았다. 왕은 동생에게 두 아들을 죽이라고 명령을 했으나 차마 그럴 수 없어 스스로 자결을 하고 말았다. 동생은 죽어 동백나무가 되었고 아이들은 동박새가 되었다. 동박새가 동백나무에 둥지를 틀고 동백꿀을 따먹으면서 사는 내력이다. 울릉도나 대청도 등지 섬에는 육지로 나간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섬의 아내가 죽어 꽃이 되었다는 설화들이 전해온다. 설백의 배경에 마치 핏덩이처럼 새빨갛게 핀 동백이 사람들의 심성을 그렇게 움직였을 것이다. 섬지역에 깃든 수많은 사람들의 애환이 이런 이야기로 창조되었을 터인데 기왕이면 좀 더 아름다운 이야기로 만들면 좋지 않을까 싶다. 동백을 한편에서는 산다화(山茶花, 산의 차꽃)라고도 하는데 이는 아기동백꽃(춘백)이다. 동백꽃차의 애용이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니 그 역사가 꽤 깊은 모양이다. 겨울에 피면 동백(冬柏), 봄에 피면 춘백(春栢)이라 하니 바람 속에 피면 풍백(風柏)이요, 눈 속에 피면 설백(雪柏), 마음속에 피면 심백(沈柏)이랄까. 어쩌면 심중의 꽃 심백(心柏)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남도지역 특히 섬지역에서 긴요하게 쓰인다. 신랑 신부가 처음 만나 마주하는 교배례의 경우, 신부집에서 마당에 초례청을 세우고 갖가지 장식을 한다. 대개 꽃병에 송죽(松竹)이나 사철나무를 꼽는데 남도지역에서는 동백꽃을 사용한다. 굳은 절개의 의미로 해석한다. 사철 푸르다는 것 외에, 시들지도 않고 꼭지 채 떨어져 내리는 낙화의 이미지도 한몫 했을 것이다. 추운 겨울에도 꽃을 피우고 많은 열매를 달기 때문에 다산의 상징으로 삼기도 한다. 동백나무 가지로 여자의 엉덩이를 치면 남아를 잉태할 수 있다는 등 임신을 돕는다는 속설이 그래서 나왔다. 이런 심미안은 그림으로도 나타난다. 묵화(墨畫)가 사군자를 그리는 것이라면 민화(民畵)는 초충(草蟲, 풀과 벌레)을 그린다. 민화라고 사군자의 소재를 그리지 않겠는가만 고고하고 절절한 기풍보다 더 인간적이고 따뜻한 감성을 강조했다고나 할까. 그 중 매화, 수선화 등과 함께 즐겨 그렸던 것이 동백꽃이다. 문자 그대로 겨울(冬)에 피는 꽃이기에 정절이나 고결의 의미를 내포한다. 뜻으로 보면 사군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조와 절개를 입에 올리기도 민망한 시대를 살고 있어서일까. 동백아가씨와 동백꽃 그림을 넘어 해안마다 지천인 동백숲이 그립다. 동백꽃 모가지 채 뚝뚝 떨어져 내리는, 마침내 바뀔 계절 기다리며 다음 졸시 한편으로 대신한다. 섬동백(島冬柏) 이윤선 너 어쩌자고 꽃술 하나 시들지도 않은 채 송이송이 꼭지 채 떨어지느냐 순백의 한겨울 무슨 곡절 그리 깊어 홑꽃잎마다 검붉은 멍들 우그린 채로 왕의 명을 받을 수 없어 스스로 자결하고선 동생은 동백나무 되고 그 아들들 동박새 되었다지. 육지나간 남편 무슨 일로 늦게 돌아와 동백으로 변한 아내 찾는 동박새 되었다지. 비로소 이름 불러주어야 꽃이 된다 하더라만 동박새 꿀물 날라주어야 피는 동백꽃만 하겠느냐 겨울마다 계절마다 순백의 풍경으로 스며들어 세상 모든 가슴앓이 감아 안는 설백(雪柏)만 하겠느냐 계절 가면 간단없던 북풍한설 지나고 세월 가면 생채기 난 나이테도 아물어지는데 당산 남쪽 조산숲으로 서고 갯골 동편 우실로 서서 바람 눈비 맞서고 물결마저 헤쳐 왔는데 너 어쩌자고 홑잎 하나 시들지도 않은 채 야속하단 한 마디 없이 댕강댕강 떨어지느냐 사철 푸른 잎가지 가없는 백설 풍경으로 두고 붉은 입술 붉은 심장 그저 초연히 떨어지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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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 서편제보성소리축제 전국판소리·고수경연대회(04/29-05/01)■ 대회명칭 제25회 서편제보성소리축제 전국판소리·고수경연대회 ■ 대회목적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 판소리의 계승발전을 위하여 경연대회를 통한 인재발굴 및 육성 ■ 대회일정 2023년 4월 29일(토) ~ 2023년 5월 1일(월) ※ 추모행사 : 5. 1.(월) 14:00, 보성판소리성지 ■ 대회일시 및 장소 ◈ 예선 ※ 위 일정 및 장소(예선‧본선)는 상황에 따라 취소 또는 변경될 수 있음. ※ 학생부 종합: 판소리 학생 고등부 대상수상자와 고수 학생부 대상수상자가 경연 ■ 참가자격 대한민국 국민으로 만 18세(2005. 4. 28. 이전 출생자) 이상의 남녀 또는 학생(초·중·고등학생) 1. 판소리 명창부는만 28세(1995. 4. 28. 이전 출생자) 이상 가. 판소리 5바탕 중 한바탕 완창자 또는 2시간 이상 발표회를 가진 자, 또는 판소리 분야 국무총리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화재청장상 수상자 나. 증빙자료 제출 : 완창 발표회 음원(CD) 또는 공연 리플렛또는 수상 증명서(해당 부처 발급용만 인정) 2. 판소리 신인부는 만 18세(2005. 4. 28. 이전 출생자) 이상 ~ 만 60세(1963. 4. 29.이후 출생자) 미만,장년부는 만 60세(1963. 4. 28. 이전 출생자) 이상 3. 기존 수상자 참가 제한(본대회 및 다른 대회 모두 포함) - 동일종목·분야에서 최고훈격을 수상한 자는 최고훈격이 동일한 종목‧분야참가 제한 - 단, 최고훈격이 상이한 경우 동일종목‧분야 참가 가능하며, 이 경우에도 훈격의 하향신청은 불가 ■ 참가신청 1. 제출서류: 참가신청서 1부(소정양식, 반명함판 사진부착) ※ 판소리 명창부: 완창 발표회 음원(CD) 또는 리플렛 또는수상 증명서등 증빙자료 제출 ※ 경연대회 당일: 신분증 지참 필수 2. 신청서 교부 및 접수 ◦ 접수기간 : 2023. 3. 20.(월) ~ 4. 24.(월) 18:00까지 도착분 ◦ 참 가 비 :없음 ◦ 접수방법 : 방문·우편·e-mail·FAX ※ 본인 및 대리신청 가능 ◦ 접 수 처 : 서편제보성소리축제추진위원회(보성문화원) - e-mail : bs2629@hanmail.net - F A X : (061)853-2629 - 우 편 : (59453)전남 보성군 보성읍 송재로 281-11 보성문화원 ◦ 접수안내 : (061)850-5892 / 852-2621, 서편제보성소리축제 홈페이지 (http://www.boseong.go.kr/tour/festivity/sopyonje) ※ 접수 후 반드시 전화 확인하기 바람 ※ 코로나19 상황에 따라 무관중 행사로 전환될 경우 참석자 제한할 수 있습니다. ■ 대회부문 부 문 경연시간(예선/본선) 비 고 판소리 명창부 30분 내외 / 20분 이상 - 예선 경연대목: 추첨 - 본선 경연대목: 자유 선택 (단, 경연대목이 중복될 때에는추첨에 의함) 대학 및 일반부 15분 내외 / 15분 내외 - 예선과 본선의 소리대목 중복 불가 신인부(단심제) 5분 내외 장년부(단심제) 5분 내외 학생부 - 고등부 7분 내외 / 10분 내외 학생부 - 중등부 5분 내외 / 7분 내외 학생부 - 초등부 5분 내외 / 5분 내외 고 수 명고부 10분 내외 / 10분 내외 대학 및 일반부 7분 내외 / 7분 내외 신인부(단심제) 5분 내외 학생부 5분 내외 / 5분 내외 ※ 경연시간은 대회의 효율적 진행을 위해 조정할 수 있음. ※ 고수는 집행부 지정고수로 하며, 필요시 경연자 대동 가능 ※ 판소리 대학 및 일반부 : 후 창자는 바로 앞 창자의 소리대목을 다시 할 수 없음. 다만 바로 앞 창자 소리대목 전체의 ⅕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전반부 또는 후반부에서 소리를 이끌어 나가거나 마무리를 위한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함 ■ 시상내용 본선 경연 완료 후 현장 시상 (신인부, 장년부, 분문별 장려상은 예선 경연 완료 후 현장 시상) (단위: 천원) 부문 \ 등위 대상 최우수상 우수상 장려상 판소리 명창부 대통령상 문화재청장상 전라남도지사상 - 40,000 10,000 5,000 - 청중평가단 인기상 1,000 대학 및 일반부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화재청장상 전라남도지사상 - 4,000 3,000 2,000 - 신인부 전라남도의회의장상 보성군수상 보성군의회의장상 보성문화원장상 1,500 700 500 200(5명) 장년부 보성군수상 보성군의회의장상 보성문화원장상 보성문화원장상 1,000 500 300 200(5명) 학생부 고등부 전라남도지사상 전라남도교육감상 보성군수상 보성문화원장상 1,200 700 500 100(4명) 학생부 중등부 전라남도교육감상 보성군수상 보성교육장상 보성문화원장상 800 600 400 100(4명) 학생부 초등부 전라남도교육감상 보성교육장상 보성문화원장상 보성문화원장상 500 400 200 100(4명) 고 수 명고부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전라남도지사상 보성군수상 - 10,000 3,000 2,000 - 대학 및 일반부 전라남도지사상 전라남도의회의장상 보성군수상 - 2,000 1,500 1,000 - 신인부 보성군수상 보성군의회의장상 보성문화원장상 보성문화원장상 800 600 400 100(4명) 학생부 전라남도교육감상 보성교육장상 보성문화원장상 - 1,200 800 600 - 학생부 종합 교육부장관상 문화재청장상 - - 1,500 1,200 - - ※명창부 대상 특전: 수상자는 보성소리 발전연구 결과로 12개월이내에 보성군내에서 공연발표를 하게 되며, 이때 보성군은 1회에 한하여 공연 무대, 홍보, 음향등을 무상 지원 ※ 시상금은 소득세법에 의거 원천징수 8.8% 공제 후 무통장 입금 ※ 학생부 종합부문 수상자에 대해서는 부문별(판소리, 고수) 시상금은 지급되지 않음. ※청중평가단 인기상: 청중평가단만의 점수로 명창부 본선 경연자 중에서 결정 (훈격: 서편제보성소리축제추진위원장) ※부문별 장려상 - 판소리 학생부(고등부․중등부․초등부) 및 고수 신인부: 각 4명 선정 / 시상금 100천원 - 판소리 신인부 및 장년부: 각 5명 선정 / 시상금 200천원 ※본 행사 훈격 및 시상계획은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 심사항목 판소리 공력(30%) 박자(20%) 성음(20%) 음정(10%) 발림(10%) 가사(10%) 고 수 한배(30%) 공력(20%) 강약(20%) 기교(20%) 자세(10%) ※ 심사위원의 점수를 합산하여 고득점순으로 등위를 정한다. ■ 심사규정 1. 심사회피로 인한 경연자의 점수는 채점한 심사위원 점수 중 최고점과 최하점을제외하고 나머지 심사위원 점수의 평균점을 회피한 심사위원점수로 부여하여 합계점수를 산출한다. 2. 본 대회는 직접스승 및 8촌 이내 친인척의 심사회피제도를 적용하므로참가자는해당 심사위원의 심사회피를 경연전에 신청해야 한다. 만약 심사회피를 신청하지 않아 수상을 한 후 회피신청 사유가 있음이 발견될 경우에는수상 취소를 결정할 수 있고, 수상자는 상장, 상패, 상금을 반환하여야 한다. ※ 판소리 명창부에 한해 경연참가자의 이해관계가 있는 심사위원은 기피신청 여부와 관계없이 서편제보성소리축제추진위원회 심사위원 선정위원회 직권으로 심사위원에서 배제한다.(예선과 본선 모두 적용) ■ 심사결과 발표방법 심사위원별 점수를 경연 직후 또는 후창자 경연 중에 스크린(전광판)으로 공개 ■ 수상자 결정방법 수상자는 심사결과에 따라 순위별로 결정한다. 같은 부문에 동점자가 있는경우에는 연장자를 선순위로 한다. 학생부에 동점자가 있는 경우에는 고학년을 선순위로 하며 같은 학년일 경우에는 생년월일을 대조하여 연장자를 선순위로 한다. ■ 코로나19 방역수칙 준수사항 경연대회 당일의 코로나19 방역수칙(사회적거리두기 행정명령) 적용 ■ 기타사항 별도의 영상촬영 및 온라인 송출 없음 장소별 시간별 보성군문화예술회관 보성군 청소년문화의집 보성문화원 보성 판소리성지 월ㆍ일 시 간 1층 공연장 2층 연습실 4. 29. (토) 10:00 ~11:00 ◦전국판소리경연대회 - 명창부(예선) ※추첨: 08:30 ※ 명창부 본선 추첨 :예선 종료직후 ◦전국판소리경연대회 - 대학 및 일반부 (예선) ※추첨: 08:30 ◦전국판소리경연대회 - 대학 및 일반부 (본선) ※추첨: 예선 종료 직후 ◦전국판소리경연대회 - 신인부, 장년부 - 시상식 ※추첨: 08:30 ◦전국고수경연대회 -학생부(예선) ※추첨: 08:30 11:00 ~12:00 12:00 ~13:00 13:00 ~14:00 ◦전국판소리경연대회 - 학생부(예선) ※추첨: 10:00 ◦전국고수경연대회 -신인부, 대학·일반부, 명고부(예선) - 시상식(신인부) ※추첨: 10:00(신인부,대학·일반부) 13:00 명고부 14:00 ~15:00 15:00 ~16:00 16:00 ~ 4. 30. (일) 09:30 ~10:00 ◦전국판소리경연대회 - 학생부(본선) ※추첨: 09:00 10:00 ~11:00 ◦전국고수경연대회 -학생부ㆍ대학·일반부ㆍ 명고부(본선) ※추첨: 09:00 11:00 ~11:30 ◦보성군립국악단 특별공연 11:30 ~13:00 13:00 ~14:00 ◦명인‧명창 고수열전 ◦학생부종합대상경연대회(본선)- 판소리 및 고수 ※추첨: 12:00 14:00 ~15:00 ◦명창부(본선) 15:00 ~16:00 ◦역대 대통령상 수상자 축하공연 ◦시상식 5. 1. (월) 14:00 ~15:00 ◦추모제, 추모공연 부대 행사 체험행사 <문화예술회관 외부> ∙ 전통악기만들기, 전통놀이체험 홍보 및 판매행사 <문화예술회관 내부> ∙ 문인협회 차소리 시화전 전시 <문화예술회관 주차장> ∙ 보성주막집 ※ 위 일정은 상황에 따라 취소 또는 변경될 수 있음. ■ 서편제보성소리축제 전국 판소리‧고수경연대회 역대 수상자 명단 판소리 고 수 학생부 종합 명창부 대학‧일반부 신인부 학생부 명고부 대학‧일반부 신인부 학생부 고등부 중등부 초등부 제1회 1998년 - 추상수 성남 이정순 광명 김정은 여수여자고 최잔디 광주중앙초 - - - - - 제2회 1999년 유판길 서울 마미숙 광주 김연례 목포 박은실 광주예술고 김소진 광주동운초 - - - - - 제3회 2000년 박정아 광주 오혜연 서울 - 임서연 군산 조나엽 강진 - - - - - 제4회 2001년 이귀례 익산 박명자 성남 - 김소희 남원서진여고 강재민 광주문산초 - - - - - 제5회 2002년 허 숙 여수 김다정 광주 이동래 보성 김혜라 보성고 이성현 서울광장초 - - - - - 제6회 2003년 이재영 보성 백금렬 고양 - 정지혜 서울국악예술고 김미영 광주풍암중 신혜인 광주경양초 - - - - - 제7회 2004년 허종열 서울 이은비 광주 - 홍준표 대구 정아영 대구 양승은 광주 - - - - - 제8회 2005년 백금렬 보성 이숙영 서울 이기쁨 파주 유성실 김제 유다운 고흥 안유미 보성 고정훈 진도 이재진 경주 박초롱 경산 - - 제9회 2006년 라경자 고흥 박지영 서울 장세웅 서울 백민정 광주예술고 임한울 광주봉산중 양혜원 남원노암초 임용남 서울 김동근 광주 정상화 서울 - - 제10회 2007년 남궁정애 성남 김계영 서울 이일진 고양 이선미 광주예술고 이진우 서울국악예술중 정은영 광주대성초 김준영 완도 고현태 전주 박경도 광주 - - 제11회 2008년 문명숙 전주 채원영 남원 조혜숙 전주 오선지 전남예술고 윤영진 조선대부속중 김승수 광주도산초 정상화 안성 조가완 광주 이병열 광주 - - 제12회 2009년 박미정 광주 임성희 안성 김옥순 광주 주희라 광주예술고 조정규 전주온고을중 윤정이 광주교대부설초 정인성 광주 최재영 서울 김소라 서울 - - 제13회 2010년 이재영 보성 최한이 천안 양인심 순천 박경태 광주 박성열 익산 이승훈 광주 김병태 고양 박성우 고양 이진수 광주 - - 제14회 2011년 김학용 서울 오혜원 진도 정석호 광주 송선호 서울압구정고 이채은 화순제일중 양수아 목포하당초 조가완 광주 김정환 담양 정신이 전주 추재형 진도석교고 - 제15회 2012년 김현주 순천 송혜원 진도 김병희 대전 정서희 경남예술고 유시은 산청단성중 심민서 진주평거초 주현주 광주 장홍준 남원 양승화 순천 한재민 함평나산고 정서희 경남예술고 제16회 2013년 김명숙 서울 이철홍 목포 박창석 진도 정윤형 전주예술고 김가을 보성여자중 조세리 성남정자초 김준영 광주 진정남 울산 최승희 서울 조의연 영광초 정윤형 전주예술고 제17회 2014년 윤종호 나주 이선미 광주 이 숙 광주 김가을 보성고 노희선 화순제일중 김한별 보성남초 안연섭 광주 이주현 남원 이춘효 목포 박상민 광주예술고 김가을 보성고 제18회 2015년 윤상호 정읍 문해돋이 인천 김강인 남양주 박상훈 서울전통예술고 송자연 국립전통예술중 유송은 광주송우초 조요한 광주 대대호 광주 정행정 진주 양인승 진도국악고 박상훈 서울전통예술고 제19회 2016년 양희빈 서울 윤혜선 나주 김금자 창원 유시은 경남예술고 양수아 국립국악중 박정우 선일초 김제훈 강진 채규룡 진도 김보금 남원 윤지혁 목포덕인중 유시은 경남예술고 제20회 2017년 박정희 무안 김주리 서울 김은숙 광주 박서희 광주예술고 김선우 남원한빛중 박혜인 광주운남초 원대근 여수 박상민 안성 정대희 광주 윤지혁 진도국악고 박서희 광주예술고 제21회 2018년 어연경 고양 이이화 서울 양동용 서울 김정욱 광주예술고 박신웅 전주예술중 임아진 정읍한솔초 양인승 나주 한재민 광주 오영환 광주 윤지혁 진도국악고 김정욱 광주예술고 제22회 2019년 김미진 서울 정승기 광주 손순임 광주 윤지혁 진도국악고 박지민 국립국악중 이지윤 영천초 이충인 부산 조인경 경기 표진이 전주 김정욱 광주예술고 김정욱 광주예술고 제23회 2021년 유재순 서울 강예빈 전주 조헌성 전남 김수진 원광정보예술고 김송아 전주예술중 범하은 광주한울초 김성찬 전남 서형준 광주 박갑렬 전남 박수현 광주예술고 김수진 원광정보예술고 제24회 2022년 이은숙 제주 이다연 서울 김부자 고흥 장은탁 남원국악예술고 이예은 보성회천중 허정운 진도지산초 조인경 전주 우승연 부산 우성호 광주 채준서 진도국악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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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문경새재에 봉황(鳳凰)이 날아들다이만유/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봉황(鳳凰)은 상서롭고 고귀한 뜻을 지닌 고대 중국에서 신성시했던 상상의 새로 천년에 한 번 꽃피는 대나무의 열매를 먹고 살 정도로 고결하며, 기린·거북(현무)·용과 함께 신령스러운 네 가지 동물인 사령(四靈)의 하나로 중화 문명의 상징이며 중국의 신조(神鳥)다. 볏이 있는 수컷을 ‘봉(鳳)’이라고 하고 볏이 없는 암컷을 ‘황(凰)’이라고 하며 암수를 합해서 봉황이라 하는데 봉황이 나타나면 천하가 태평해진다고 믿었다. 봉황(鳳凰)의 생김새는 문헌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묘사되어 있다. 전체 모습은 닭과 같고 오색 문채(文彩)를 띠고 있는데 중국 후한 때 허신(許愼)이 편찬한 자전(字典)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봉의 앞부분은 기러기, 뒤는 기린, 뱀의 목, 물고기의 꼬리, 황새의 이마, 원앙새의 깃, 용의 무늬, 호랑이의 등, 제비의 턱, 닭의 부리를 가졌다고 하였으며 ‘악집도(樂汁圖)’에는 닭의 머리와 제비의 부리, 뱀의 목과 용의 몸, 기린의 날개와 물고기의 꼬리를 가졌다고 하였다. 또 어떤 문헌에는 ‘머리 앞쪽은 수컷 기린, 뒤쪽은 사슴, 목은 뱀, 꽁지는 물고기로 용과 같은 비늘이 있고, 등은 귀갑(龜甲)과 같으며, 턱은 제비, 부리는 닭과 같다’라고 하였으며, 중국 당나라 역사서인 ‘주서(周書)’에는 봉의 형체가 닭과 비슷하고 뱀의 머리에 물고기의 꼬리를 가졌다고 하였으며, 용과 학이 교미하여 낳은 새라고도 하였다.이처럼 봉황의 모양을 각각 다르게 묘사하거나 설명한 것은 봉황이 전설 속 상상의 새이기 때문일 것이다. 예로부터 벽사(辟邪)의 신통력을 가진 동서남북을 수호하는 방위신(方位神)으로서 좌청룡·우백호·남주작·북현무가 있다. 다시 말해 동쪽의 청룡(靑龍), 서쪽의 백호(白虎), 남쪽의 주작(朱雀), 북쪽의 현무(玄武)를 일컫는데 그중 남쪽을 수호하는 남방신(南方神)은 주작으로 곧 붉은 봉황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남쪽에 주작이 그려져 있고 풍수지리학적으로 명당을 찾을 때나 건물을 지을 때도 하나의 기준이 된다. 봉황 문양은궁궐, 사찰, 백제의 금동용봉대향로, 고려청자, 민화 등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전통혼례식에서 봉황(닭)을 날려 보내는 등 우리 역사와 민속과 전통 속에 살아 있으며 조선 시대 때에는 성군(聖君)의 상징이기도 하였으며 청와대 와 대통령의 상징 마크가 봉황인 까닭도 국민을 위한 대통령이 되라는 의미가 있다. 이렇듯 봉황은 우리들의 삶 가까이 있다. 문경에도 예외가 아니다. ‘문경새재오픈세트장’에는 실재하는 서울 경복궁(景福宮)과 똑같이 설계하여 지은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光化門)이 있다. 궁궐 남쪽에 자리 잡은 광화문 위쪽 천장을 보면 봉황이 그려져 있다. 이는 이 봉황이 궁궐 밖 사악(邪惡)한 기운이 궁궐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 주어 왕손이 번성하고 종묘사직을 지키면서 태평성대를 이루게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이런 신령한 봉황이 문경새재에 살고(?) 있다. "무슨 소리야!” 하겠지만, 봉황이 있다. 이 봉황은 실재의 봉황이 아니고 신기하게도 소나무 가지가 어울려 봉황의 모습을 하고 있다. 몇 년 전 어느 관광객이 우연히 발견하여 알려졌는데 연간 수백만 명이 문경새재를 찾아오지만, 대다수 관광객이 이를 보지 못하고 지나가는데 이번 기회에 이를 널리 알리고 문경새재를 방문하신 모두가 봉황의 기운을 받아 횡액(橫厄)을 물리치고 건강하고 뜻하는바 모든 것을 이루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시길 기원해 본다. 이 봉황은 바로 조선 시대 신임 경상감사가 전임 감사로부터 업무와 관인(官印)을 인수·인계받던 교인처(交印處)인 교귀정(交龜亭) 앞 노송(老松)에 깃들여 있다. 이곳을 지나면서 우연히 시선이 가거나 아니면 어떤 계시(啓示)에 의해 이를 보게 되면 하루의 일진(日辰)이 좋은 것은 물론, 복권을 사면 당첨될 확률이 높고, 그리운 사람을 만날 수 있고, 취업이나 수능 등 시험을 앞둔 사람이라면 합격하거나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으며, 심지어 이 봉황을 보게 되면 좋은 기운이 3년까지 그 효험이 지속되어 만사(萬事)가 형통(亨通)한다는 입소문이 돌았다. 그러니 억지로라도 문경새재를 찾아와서 한 번쯤은 보는 것이 좋지 않겠나. 그 외 문경에는 봉황과 관련된 지명이나 봉황과 얽힌 이야기가 많다. 마성면 신현3리 봉생(鳳笙)마을 유래를 보면 먼 옛날 안동 권씨 한 분이 처음 정착하였는데 얼마 후 세상을 떠나 마을 옆 동그란 야산에 있는 봉황포란형(鳳凰抱卵形) 묘터를 잡고 묘혈(墓穴)을 파는 중에 반석(盤石)이 하나 나왔다. 이 바위를 들어내니 신선의 세계에서 연주된다는 생황(笙簧) 소리가 은은히 들리면서 갑자기 봉황이 날아올랐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전설을 듣고 마을 이름을 ‘봉생’이라 불렀다. 그런데 봉생의 한문 표기를 보면, 봉황이 난 곳이라 날 生(생) 자를 써서 봉생(鳳生)으로 쓴 것이 아니라 생황 笙(생) 자를 쓴 봉생(鳳笙)으로 되어 있음은 바로 생황 소리가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또 여기에서 날아오른 봉황이 훨훨 날아 조금 떨어진 산에서 울었다 하여 그 산 이름이 봉명산(鳳鳴山)이 되었다. 봉명산이 문헌상 처음 나타난 것은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문경현조’에 ‘봉명산은 현의 동쪽 8리에 있다’라는 기록이다. 그리고 생황과 관련된 곳으로 문경시 가은읍 선유구곡(仙遊九曲) 제8곡 난생뢰(鸞笙瀨)가 있는데 여기가 난새(鸞鳥)가 날고 생황 소리가 울려 퍼져 곧 신선의 세계가 가까워졌다는 것을 암시하는 곳이다. 통일신라 시대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희양산문(曦陽山門) 봉암사(鳳巖寺)가 자리 잡은 곳의 지세(地勢) 또한 봉황이 날개를 펼친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과 지난해 보물로 지정된 봉암사 일주문인 봉황문(鳳皇門)이 있다. 필자가 사는 서쪽 산 바위 위에 봉황이 자주 내려앉았다고 하여 봉암리(鳳巖里)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박정희 대통령이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초임(初任)으로 3년간 문경서부심상소학교(현 문경초등학교)에서 훈도(교사)로 재직할 때 하숙집이었던 청운각 우물에 봉황이 깃들여 산다는 오동나무가 한 그루 자란 후에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었다는 이야기 등이 있다. 또 문경시 가은읍 전곡리에 있는 ‘강릉최씨 열부각(江陵崔氏 烈婦閣)’의 주인공인 ‘강릉최씨’는 소녀 시절 시서(詩書)를 배우고 예절과 행실이 남달랐는데 안타깝게도 남편이 일찍 죽게 되었다. 그때 애끓는 마음으로 지은 제문 중에 ‘봉황이 함께 날아 어울려 노래를 즐겼는데 봉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아 황이 홀로 슬피 우네’라는 구절이 있다. 강릉최씨는 제문을 읊은 이후 절식, 자결하니 모두가 열부(烈婦)라고 칭송하였고 조정(朝廷)에서 그 정절(貞節)을 기리기 위한 정려(旌閭)를 내렸다는 슬픈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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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조선의 명당 ‘연주패옥(連珠佩玉)’과 ‘말무덤’이만유/전 문경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은 신라 말 도선비기(道詵秘記)로 유명한 도선(道詵)에 의해 비롯되어 고려 때 크게 유행하였으며 지형(地形)이나 방위(方位), 산세(山勢)·지세(地勢)·수세(水勢) 등을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에 연결하여 집터나 묏자리를 구하는 이론이다. 근래에 와서는 음양오행(陰陽五行)을 기초로 한 풍수지리학(風水地理學)으로 하늘과 땅의 자연현상을 합리적으로 이해하여 인간으로서 바람직한 삶과 행복을 추구하는 학문으로 발전하였다. 예부터 명당(明堂)의 유형은 다양하다. 우리가 자주 들을 수 있는 명당을 몇 가지 살펴보면, 천계(天鷄)가 알을 품고 있는 형세의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으로 보통 닭이 20여 개의 알을 품으므로 이 지형의 소응(昭應)은 받게 되면 대대로 많은 자손을 둘 수 있어 집안이 번성하고, 무리를 이끄는 위대한 호걸이 난다는 명당이 있고,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은 선녀가 금(琴)을 타고 춤추고 노래한다는 땅으로 대대로 자손이 번성하고 부자가 되며 과거급제 등 집안에 경사가 많이 생겨 잔치를 자주 연다는 명당이다. 쌍룡농주형(雙龍弄珠形)은 용이 여의주(如意珠)를 물고 승천하듯이 쌍용이 구슬을 가지고 희롱하니 후손들이 곧 등용되어 대관(大官)이 날 수 있는 곳이다. 그 외 자손이 모두 원만하고 고귀하며 화려한 생활을 하게 된다는 연화부수형(蓮華浮水形), 박정희 대통령을 탄생시킨 금오산(金烏山) 제왕지지(帝王之地)인 삼족오(三足烏)의 기운을 받은 금오탁시형(金烏啄屍形)등이 있다. 풍수상 절대 집(양택-陽宅)을 지어서는 안 되는 3가지 집터로 살풍(殺風)을 맞을 수 있는 계곡, 삼각형 모양의 땅, 날카로운 칼날 끝이 자신을 향하고 있는 ‘충(冲) 받는 위치’는 피해야 한다고 풍수 전문가 최우식 교수는 말했다. 우리나라 대통령 관저였던 청와대(靑瓦臺) 터는 서울의 천원(天元)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북악산의 강한 살기가 압도하는 풍수지리학적으로 좋지 않은 흉지(凶地)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청와대 살았던 역대 대통령 누구도 끝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풍수지리학자들은 경복궁은 사람이 사는 땅이고 청와대는 죽은 자의 땅이라며 거기에 살면 불운하게 된다고 하였다. 조선 8대 명당(明堂) 중 하나라는 대명당 연주패옥형(連珠佩玉形) 묫자리가 경북 문경시 동로면 적성리에 있다. 이 명당은 약포(藥圃) 정탁(鄭琢 1526∼1605) 대감과 두사충(杜師忠)과의 인연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중국 명나라 원정군사령관 이여송(李如松 1549∼1598)을 수행한 풍수 전략가 두사충이 벽제관(碧蹄館) 전투의 패전 책임을 지게 되어 참수(斬首)당하게 될 위기에 처했다. 이때 예천 출신 약포 정탁 대감의 구명(救命)으로 살게 되었다. 두사충은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신후지지(身後之地-생전에 미리 잡아두는 묏자리)를 잡아주었는데 그곳이 바로 이 연주패옥 명당 묘터이다. 약포 정탁 대감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삼도수군통제사 충무공 이순신이 전략상 불가피하게 조정의 출정 명령을 따르지 않았는데 그 죄로 파직당하고 한양으로 압송되어 모진 국문(鞫問)으로 반죽음 상태에서 곧 처형될 위기에 처했을 때 정탁 대감이 죽음을 무릅쓰고 이순신의 목숨을 구원해 달라고 청하는 ‘논구이순신차(論救李舜臣箚)’ 상소문을 선조에게 보내 죽음 직전에서 백의종군의 명을 받고 가까스로 풀려났다. 목숨을 건 정탁 대감의 직언(直言)이 이순신을 살리고 이순신은 군사 120여 명과 병선 12척뿐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고군분투하여 대승한 명량대첩으로 나라를 구했다. 그런 정탁 대감에게 두사충이 잡아준 연주패옥혈(連珠佩玉穴) 명당은 선녀인 옥녀가 화장하기 위해서 거울을 보며 옥구슬을 꿰어 목에 걸고 있는 형세(形勢)로 옥관자(玉寬子) 서 말, 금관자(金寬子) 서 말이 나온다는 곳이라고 한다. 즉 옥관자(玉寬子)는 조선의 왕과 왕족, 당상관인 벼슬아치가 쓰던 옥으로 만든 망건 관자이고 금관자(金貫子) 금으로 만든 관자로 정이품, 종이품의 벼슬아치가 달았는데 이런 관자를 각각 서 말을 지녀 자자손손 수없이 많은 관리를 배출하고 영화를 누릴 수 있는 곳으로 놀랍고 아주 특별한 명당이다. 이 연주패옥혈(連珠佩玉穴) 명당이 있는 곳에 말무덤(馬塚-마총)이 하나 있다. 무송대(舞松臺)라는 큰 바위 옆에 노송 한 그루가 있고 거기에 말무덤이 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두사충이 조선 땅을 모두 살펴보고 백두산 정기를 머금고 남으로 뻗은 백두대간이 지나는 이곳에 조선의 팔대 명당(八大 名堂)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명당을 찾아내어 자기 목숨을 구해준 약포 대감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대감의 신후지지(身後之地)를 정해주었다는데 대감과 가족이 한양에 있는 관계로 대감의 구종(驅從-관원을 모시고 다니던 하인)에게 묘터를 알려 주게 되었다. 그 후 정탁 대감이 낙향하여 자기 아들에게 두사충이 정해준 묫자리를 찾아 정확한 위치를 알아두라 하여 아들은 구종과 함께 이 무송대에 이르러 "그 명당이 어디냐?" 하고 묻자 "예, 여기서 백보지내(百步之內)에...”하며 손을 들어 위치를 가리키며 말하고자 하는데 갑자기 말이 미친 듯이 날뛰며 뒷발질하여 구종이 즉사하게 되었다. 아들이 갑자기 일어난 일에 당황하고 화가 치밀어 단칼에 말의 목을 베었다. 이렇게 하여 천하대명당(天下大明堂) 진혈(眞穴)은 세상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이 영원히 시간 속에 묻혀 버렸다. 이후 전국 지관(地官)들의 관심사가 되었으며 많은 사람이 이곳에 와서 명당자리를 찾으려 했지만, 찾지 못하고 오리무중에 싸여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일설에 의하면 어느 풍수가 진혈이라고 판단되는 곳을 매수하여 소유하고 있는데 모 그룹 재벌이 20억 원에 사겠다고 했지만, 200억 원을 달라고 해서 매매가 되지 않았다는 소문도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났건만 오늘날에도 연주패옥혈 명당을 찾는 사람들이 많고, 지금까지 진혈(眞穴)을 찾지 못한 채 말무덤 사방 백 보 안에 알게 모르게 묘를 쓰고 있다고 한다. 어느 유명 풍수지리학자께서는 여기는 백두대간의 모든 氣기 이곳에 응취(凝聚), 응결(凝結)되었기에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기가 강해서 일반인이 여기에 묘를 쓰면 오히려 해를 입을 수도 있고 비보(裨補) 또한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정탁 대감집 말(馬)이 이런 사실을 알았기에 천기누설(天機漏洩)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자기의 주인인 정탁 대감 가문(家門)의 멸문(滅門)을 막기 위해 구종이 입을 열지 못하게 하였다는 설과 구종이 자기 선대를 모시려는 욕심으로 딴 곳을 가리키려고 하는 의도를 알고 죽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전설의 명당 / 이만유 문경 동로 갈밭골에 연주패옥(連珠佩玉) 천하 명당 두사충이 은혜 갚은 약포 대감 신후지지(身後之地) 외롭게 전설을 품고 누워있는 말무덤 백두산 정기 서린 조선 땅 최고 명혈 천기누설(天機漏洩) 막음인가 말 뒷발질에 사라졌네 무송대 육백 년 노송 너는 알리 진혈(眞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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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전국농악경연 대상에는 '용구농악'경상북도와 구미시는 지난 10일과 11일 양일간, 구미 박정희체육관에서 ‘2022 구미전국농악경연대잔치’를 개최했다. 한국농악보존협회 구미지회(지회장 박정철)가 주관하는 이번 행사는 첫째날, 구미 지역민들과 지역문화재 위주로 구성된 경연을 펼쳤고, 둘쨋날에는 일반부, 학생부로 이뤄진 우리 전통음악을 계승, 발전하고 있는 전국 각지 단체들의 농악 경연을 펼쳤다. 첫날 개회식에서는 구미시 읍·면·동 농악경연대회에 출전하는 구미시민들로 이뤄진 지역농악단 20개의 단체 모든 참가자들이 지역전통음악 합동연주로 잔치의 시작을 열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농악공연 실황을 볼 수 있었다. 춤추는 바람꽃이라고 불리는 호남여성농악단의 마지막 상쇠인 유순자(사단법인 호남여성농악보존회 이사장), 호남여성농악단 원년멤버 김정숙(여성 농악단 팔산대 예술고문 HSM 대표이사), 김병천(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18호 진도북놀이 보유자), 삼도채상소고놀이 이동주(중요무형문화재 제3호 남사당놀이 이수자), 윤매고동 (설장구놀이) 등이 특별 초청공연이 펼쳤으며, 국가무형문화재인 '진주삼천포농악'(농악12차)과 제63회 전국민속예술축제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한 '구미농악단'의 신명나는 무대가 한 자리에서 선보였다. 첫날 구미시 지역경연대회에서 20개팀이 농악과 전통연희로 경연을 하였으며, 영예의 대상은 구미발갱이풍물단이 거머쥐었으며, 둘째 날 전국경연대회에서 용인전통연희원이 '용구농악'을 선보이며 치열한 경쟁 끝에 대상의 명예를 수상했다. 김장호 구미시 시장은 "이번 대잔치가 대한민국의 전통과 한민족의 ‘흥’을 널리 알리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편 국가무형문화재 제11호인 농악(農樂)은 옛 전통사회의 모습을 담은 학술적 가치와 함께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공동체적 연대의식을 담아낸 일상생활의 공동체 놀이문화이다. 현재와 미래의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지속가능성 문화유산이며 2014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그 가치성을 인정받았다 박정철 지회장은 "구미농악경연대잔치는 지난 2017년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된 지역의 대표 문화유산인 '구미무을농악'을 전승, 보전을 하고 구미무을농악의 우수성을 전국에 알리며 구미시의 대표적인 행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며 "이번 농악명인전 축하공연과 전국농악경연으로 전통문화의 멋을 공유하고,구미시 읍·면·동 농악경연대회는 구미시민들을 단합과 화합을 도모하는 장이 되었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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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 내려온다’ 이후 3년 만에… ‘조선팝 아이돌’이 돌아왔다‘조선팝 아이돌’, 2019년 ‘범 내려온다’를 선보인 7인조 밴드 이날치에게 붙은 별칭이다. 어깨춤이 자동 ‘발사’되는 서양 리듬과 판소리 보컬의 절묘한 조화, 갓을 쓴 머리를 흔들어대며 중독성 강한 스텝을 밟는 현대무용 그룹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까지…. 이 환상적인 조합이 담긴 한국관광공사 홍보 유튜브 영상은 전 세계 누적 조회수 6억 뷰를 넘겼다. 이듬해인 2020년 ‘약성가’ ‘좌우나졸’ 등을 함께 담아 낸 데뷔 앨범 ‘수궁가’는 한국대중음악상(18회)에서 ‘올해의 음악인’ ‘최우수 모던록’ ‘최우수 크로스오버’ 등 3관왕을 차지했다. ‘범 내려온다’ 이후 3년, 이날치가 신곡을 잔뜩 들고 돌아왔다. 총 11곡을 오는 28~30일 서울 LG아트센터 ‘물 밑’ 공연에서 선보인다. 공연곡은 다시 편곡해 내년 상반기 정규 2집에 실을 계획. 정식 앨범을 내고 신곡 공연을 갖는 통상적인 음반 발매 절차를 거꾸로 밟는 것이다. 다만 이번 무대에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는 오르지 않는다. 이번 신곡들은 생명의 근원지인 ‘물 밑’을 찾아 떠난 천문학자 이야기를 판소리로 창작해 곡을 붙였다. 기존 판소리 다섯 마당에서 이야기를 따온 전작 ‘수궁가’와 달라진 점. 19일 서울 강서구에서 만난 이날치 멤버들은 "옛이야기를 또 가져오면 국악 이름이 ‘틀’처럼 덧씌워질 것 같았다”고 했다. "판소리가 바탕이긴 하지만, 결국 하고 싶은 건 ‘팝 음악’이거든요.(리더 장영규)” 이들은 데뷔 초부터 스스로를 ‘얼터너티브 팝 밴드’라 소개해왔다. 멤버들은 올해 초 한 달간 신곡에 담을 이야기를 각자 단편소설처럼 써보고, 그중에 가장 좋은 걸 고르길 반복했다. 박준철은 웃으며 그렇게 추린 이야기를 이번 공연 연출을 맡은 박정희 극단 풍경 대표가 짜임새 있게 엮었다고 했다.. "채택되지 못한 슬픈 이야기 파일이 노트북에 30개 넘게 남아 있다”(박준철) 밴드는 소리에도 변화가 생겼다. 권송희·신유진·안이호·이나래, 판소리 보컬들도 손에 건반·신시사이저·타악기 등을 직접 들고 연주를 하기 시작한 것. 두 대의 베이스(장영규·박준철)와 드럼(이철희)만 갖고 소리의 뼈대를 채울 때보다 곡 구성이 훨씬 풍성해졌다. ‘히히!하하!’ 중독성 강한 추임새를 로큰롤 연주에 얹은 신곡 ‘히히하하’는 최근 일부 국내 공연에서 먼저 선보였는데, 금세 따라 부르는 관객을 양산했다. "연습 때 놀러 온 권송희씨의 어린 아들이 이 곡 듣고 춤을 추더군요. 이거다 싶었죠. 하하.(장영규)” 멤버들은 지난달 영국·네덜란드·헝가리·벨기에 유럽 4개국 5개 도시 투어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영국에선 특히 세계적 밴드 U2와 콜드플레이 명반들을 프로듀싱한 ‘브라이언 이노’가 관람했다. "이상한 노래가 들어있는데 재밌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이날치 음악에 그쪽(외국) 사람들도 들썩들썩하는구나. 안도감, 확신을 얻었죠.(안이호)” 이들은 내년 하반기에도 해외에서 앨범과 공연 활동을 이어간다. 장영규는 "이날치는 상업 밴드였으면 좋겠다”고 했다. "국내는 사실 밴드 음악이 설 방송도 무대도 거의 없죠. 이날치 음악은 특이한 사례고요. 이런 음악이 어디까지 갈 수 있나. 확인해 보고 싶네요.”(장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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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문경 탄광촌 이야기이만유/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석탄은 우리나라의 유일한 부존에너지 자원이다. 문경은 국내 제2의 탄전지대로서 1926년 대성탄좌가 남한 최초의 석탄광산으로 개광되었고 그 이후 73개의크고 작은 광산들이 생겨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석유, 가스 등 고품질 연료의 공급과 화석연료로서 환경 문제 등으로 인한 시대의 흐름에 따라 1994년 7월 30일 은성광업소가 마지막 문을 닫으면서 문경 인구16만 명의 번창했던 한 시절 영화를 뒤로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내 고향 문경이 다시 도약하는 제2의 번영을 꿈꿔보면서 오늘은 그때 그 시절을 생각하며 이런저런 탄광촌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1979년 10월 27일 새벽 은성광업소 13편 병반 근무 시 갱내에서 대형화재가 발생하여 44명이 희생되는 아픔이 있었다. 화재 바로 전날인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께서 서거하신 날이라 큰 뉴스에 가려졌지만, 화재가 난 다음 날 북한 방송에서 이 사고에 대해 보도가 있었다고 한다. 어떻게 북한에서 신속하고 정확한 보도를 한 것일까? 이상하게 여긴 정보기관에서 사회 혼란을 획책한 간첩에 의한 방화로 추정하고 당일 근무자들을 조사했다는 비공식적인 뒷말이 돌기도 하였다. 그러나 화인은 담뱃불 등 여러 설이 있었으나 정밀 조사 결과 석탄을 운반하는 체인컨베이어 마찰 과열로 고무 부분에서 발화한 것으로 최종 결론이 났다. 이렇게 탄광에서는 크고 작은 많은 사고로 인명피해가 자주 발생하므로 광부의 생활은 전전긍긍 불안하였고 그런 관계로 탄광과 탄광촌에는 금기사항이 많았다. 지금은 말도 안 되는 소리이지만 광부가 출근하기 전에는 여자가 광부 집을 방문하지 않는다. 그리고 광부들의 출근길에 여자가 가로질러 가면 부정(재수 없다)을 탄다고 하여 광부 출근길에는 대체로 여자들이 밖으로 나오지 않았으며, 광부들이 많이 사는 마을에서는 이장이 출근 시간 직전에 "동민 여러분, 지금 광부 아저씨들이 출근하는 시간이니 밖으로 나오지 마시기 바랍니다.”라고 마을 방송을 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었다고 한다. 금기는 어떤 대상에 대한 접촉이나 언급을 금지하는 것으로 이런저런 탄광촌의 금기사항을 살펴보면, 전날 밤 꿈자리가 뒤숭숭하면 출근하지 않는다. 남편 출근할때 잔소리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 부부싸움 후에는 가급적 갱에 들어가지 않는다. 부인이 도시락에 쌀때 죽을 사(死)자는 불길하다고 해서 밥을 담을 때 4번의 주걱질로 밥을 푸지 않는다. 도시락 보자기는 길하다는 청색, 홍색만을 사용한다. 남편이 출근한 후 벗어 둔 신발을 방 안쪽으로 향하게 놓는다. 바깥쪽으로 두면 혼이 나간다는 뜻이고, 갱내에서는 귀신을 부른다며 휘파람을 불지 않는다. 출근길에 생명체를 밟거나 짐승을 치면 그날은 더욱 조심하거나 출근하지 않는다. 등이다. 막장(working face)은 터널의 굴착에서 최전위(最前位)의 단면이고 탄광의 갱도 끝에 있는 채굴이나 굴진(掘進) 작업장이다. 막장은 밀폐된 공간이고 지열과 지하수에 의해 덥고 습하면 공기도 희박하다. 이런 곳에서 일하면 온몸은 금방 땀으로 뒤범벅이 된다. 옷에 스며든 땀을 여러 차례 짜서 입기도 하며 진폐를 예방하기 위해 쓰는 방진마스크도 안전을 위해 입는 광부복도 더위와 숨이 차서 착용하기가 어려워 팬티 바람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으면 금방 콧구멍이 막히고 입속은 까맣게 되지만 성과를 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한다. 그런 막장을 사람들은 광부를 비하하는 말로 변질시켜 ‘끝장’의 뜻으로 인생 갈대까지 간 사람, 막다른 상황에 처한 사람으로 인식하며 몸만 성하면 언제든지 일할 수 있고 언제 어디서 사고로 죽을지도 모르고 사회적으로 이것저것 해도 안돼 더 이상 갈 데가 없는 사람들이 탄광으로 온다는 잘못된 인식 때문이다. 오늘의 선진 대한민국을 만든 산업 역군인 광부들을 이렇게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광부들은 캄캄한 지하 악조건하에서도 가족과 국가를 위해 일하며 내일의 꿈을 키우고 희망의 꽃을 피웠던 사람들이다. 광부와 쥐는 친구이고 쥐는 광부의 생명을 지켜준다. 갱내에서 쥐를 발견하면 광부들은 안심하고 작업을 한다. 갱내에는 석탄층에서 발생하는 폭발성 가스인 메탄가스나 유독가스인 일산화탄소 등의 유해 위험 가스가 많으므로 갱내에 쥐가 살고 있다는 것은 유해 가스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쥐는 아주 영리한 동물이고 사람의 청력으로 들을 수 없는 미세음이나 진동을 듣고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갱내에서 발생하는 출수 사고나 붕괴 사고 등을 미리 예감한다. 그래서 광부들은 쥐가 활발하게 움직이는지 비실비실하는지 그 움직임을 보고 사고의 위험을 미리 인지하여 피할 수 있다. 작업 중 도시락 먹을 때 쥐에게도 음식을 나누어 주는 것은 생명을 지켜주는 쥐에게 고마움의 표시이고 정이다. 죽탄이란 물과 석탄이 뒤범벅되어 마치 죽처럼 된 상태를 말한다. 지하 갱도에는 지하수가 흐르고 갱도를 굴착할 때는 우선으로 이 물을 배수하여야 한다. 그런데 지하에 있는 물이 배수로로 빠지지 못하고 석탄층으로 스며드는 경우가 있다. 석탄층에 물이 계속 스며들면 물과 석탄이 섞여 팽창하다가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어느 순간 터지게 되고 엄청난 힘으로 광부가 있는 갱도로 밀려 나온다. 많은 양의 죽탄에 휩쓸리면 갱내에 철로 된 장비들도 엿가락처럼 휘게 되고 사람의 사지가 절단되는 등 치명상을 주며 죽탄에 매몰되면 인명구조가 어렵고, 심할 때는 시신도 찾기가 힘든 상상을 뛰어넘는 끔찍한 상황이 된다. 은성광업소에서 1981년 죽탄사고가 발생하여 9명이 매몰되어 8명이 사망하고 1명은 115시간 만에 극적으로 구출된 큰 사고가 발생한 적이 있었다. ‘무너진 갱속에서 사투 1백15시간, 매몰 광부 극적 생환’이란 신문 보도에 나온 그 기적의 광부 이름은 ‘이옥철’, 캄캄한 어둠과 배고픈 공포의 5일간을 비상 식염과 나무껍질로 연명하면서 살아 돌아온 의지의 광부는 필자가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 시 졸업 후 처음으로 신문 지면에서 만난 중학교 동기였다. 그래서 한번 만나 보고 싶어 현재 어디서 살고 있는지 수소문해 보았더니 구출되고 얼마 뒤 안타깝게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다. 운명의 여신은 구원의 손길을 두번 주지 않았구나 하며 원망과 허무를 느꼈다. 여성을 금기시하는 광산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여성 광부가 있었다. 탄광에서 사고로 순직한 남성의 부인을 선탄부로 특별 채용한 것이다. 여성 광부들은 석탄과 돌을 분리해내는 선탄 작업을 하는데 겨울철이 가장 힘들었다. 얼어붙은 석탄과 돌에 손이 달라붙어 장갑을 끼고 있어도 항상 동상으로 고생하였고, 몇십 년 동안 선탄장에서 일한 여성 광부들은 관절로 인해 손마디가 굵어지게 된다. 그런데 기름기 있는 괴탄과 석탄가루로부터 피부 보호 차원에서 손과 얼굴에 좀 짙은 화장을 하는데 말하기 좋은 사람들이 남자 꼬실려고 저런다고 수군대기도 하여 남편 잃고 시부모 봉양하며 자식 키우면서 어렵게 사는 사람의 가슴을 후벼 파기도 하였다. 탄광촌에는 애환이 스민 숱한 이야기가 많지만, 마지막으로 미소를 짓게 하는 이야기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어떤 광부가 공부를 열심히 하여 대우가 좋은 화약관리자 시험을 현지에서 보게 되었는데 시험관의 질문에 긴장하여 "화약 100개 정도를 넣고 폭파하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하니 답은"대발파”인데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아 큰소리로 "꽝”입니다. 라고 해서 시험관도 응시자도 모두 한바탕 웃음바다를 이루었고 시험관이 기분이 좋아졌던지 "합격!”이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어떤 광부가 갱도에서 작업 중에 남몰래 술을 먹었다가 감사관에게 들켰는데 변명의 말이 "비번에 먹은 술이 본방에 취합니다.”라고 하여 한바탕 웃고는 용서하였다고 하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화석(化石)/ 이만유 가은선 폐선로 위에 한 남자가 멍하니 앉아있다 힘겹게 숨 쉬는 그의 폐에는 삼억년 전 고생대 석탄기 양치류가 자라고 삼엽충이 바스락거리며 기어 다니고 있다 일억 오천만 년 전 중생대 쥐라기 공룡이 밟고 지나고 익룡이 날개를 퍼덕이다 부리로 쪼면 각혈을 한다 고통은 뱀처럼 꿈틀댄다 따가운 햇볕이 정수리를 내리쬐는 정오 힘에 부친 듯 눈을 감는다 검은 하늘 칠백 미터 지하 캄캄한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귀에 익은 소리 소리들 곡괭이 소리, 착암기 소리 공기압축기 소리, 권양기 로프 소리 체인벨트 돌아가는 소리 광차 소리, 폭약 소리 아우성치는 소리 김씨! 하고 부르는 소리 저녁노을 붉게 물드는 시간 이제 차오르는 숨을 고르기 위해 조용히 눕는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들이 탄 기차가 기적 소리를 내며 떠난다 손을 흔든다 가은선 폐선로 위에 한 남자가 미동도 없이 누워있다 나뭇가지처럼 마른 몸에 검은 피, 순환을 멈추고 천천히 화석이 된다 고정탄소비율 95%의 석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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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말한다] 양삼승의 장편소설 ‘다섯 판사 이야기’최근 ‘법조인’이란 말은 생활어 수준의 일상어가 된 듯하다. 그만큼 판사, 검사, 변호사가 빈번하게 뉴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소위 뒷담화의 소재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기가 바뀌기 전까지만 해도 판사, 검사, 변호사라는 법조인은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여 명성을 얻은 이들을 존경의 대상으로서 언급하던 시절이 있었다. 바로 그 시절, 그 권위의 이름으로 거론 되었던 판사 다섯 명 생애를 소설로, 서사화한 작품이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 세기 후반 불의에 저항하여 정의의 용단을 내린 판사들, 장편소설 ‘다섯 판사 이야기’에 담겨있다. 특이하게도 이 소설은 자신을 3인칭으로 소재화한 판사 경력 25년, 변호사 경력 23년의 법조인에서 작가로 변신한 양삼승의 첫 작품이다. 표재 옆에는 "판사는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라는 카피로 주제를 암시했는데, 작가의 시각에서 비극적 사법 역사에 대한 반성을 촉구한 것으로, 적어도 자신을 포함한 네 명의 판사는 불의에 대해 저항한 갈등의 역정을 그려냈다. 이 기법으로 등장 시킨 판사들의 삶 전체를 서사화 하였다. 그리고 그 갈등의 극적 시대(時代) 배경을 넌픽션 ‘우리나라에서 법원과 검찰 청사는 왜 나란히 있는가?’라는 논쟁적 논제(論題)를 제시했고, 미주(尾註)까지 단 것. 논증적 다큐드라마 문체로 ‘시대의 울분’과 ‘정의 시대의 안도(安堵)’를 오가게 하는 작품이다. 자신을 포함한 네 판사는 실명으로, 한 명은 이니셜로 등장시켰다. 첫 번째 주인공은 1971년 군인의 희생으로 국고 손실을 막아야 한다는 데 의문을 제기했다가 비자발적으로 퇴임한 양회경 대법원 판사이다. 두 번째는 1976년 고등학교 교사의 긴급조치 위반 무죄 판결을 내렸다가 좌천인사를 당하고 사임한 이영구 부장판사이다. 세 번째는 양병호 대법원 판사이다. 1980년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한 김재규에 대한 대법원 판결에서 내란목적의 폭동이 아니라 단순 살인죄라고 소수의견을 밝혔다가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끌려갔던 사연이다. 네 번째 판사 이야기는 저자의 사(私)소설이다. 대법관이던 부친이 ‘판결의 내용을 이유로’ 판사직에서 물러나는 법치 후진적 비극을 생생히 목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어서 우리나라 사법부와 검찰의 개혁 필요성을 통감하며 헌법재판소 연구부장, 대법원장 비서실장, 청와대, 검찰, 언론 등 사법 인접권력과의 역학관계를 이해하게 된다. 마지막은 사법부의 각성을 촉구하며 검찰의 오만을 질타하는 글을 발표하고 용기와 소신을 담은 획기적인 판결을 내리는 용단, 결국 집요한 소수 반대파의 프레임에 휘말려 1999년 52세의 나이에 비자발적으로 사법부를 떠나는 대목으로 이야기를 전개 했다. 다섯 번째 판사 이야기는 'X. Z. Yang' 판사의 이야기로 절반 정도는 픽션화 하였다. 모두 70년 우리나라 법조사의 실재 인물들이니 실록소설이다. 작품의 행간에는 작가의 판사관(觀)이 스며있다. 그것은 사법부 구성원인 판사들은 나약한 지식인으로 생각만 있고 행동이 없었다. 연구만 있고 실천이 없었다. 지식만 있고 전략이 없었다. 소박한 현실에 안주하였고, 과감한 도전에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용단을 내린 판사가 분명히 있었음을 담아 낸 것이다. 저자는 작가의 변(辯)에서, "50년의 터울을 두고 태어난 다섯 세대의 판사를 통해서 우리나라 사법부 70년의 역사를 그려보려고 했다"며 "소설로 탈고한 이유는 논문에는 감동이 없지만 이야기에는 감동이 있고 내가 있기 때문"이라고 의지를 표명했다. 1999년 52세 때, 비자발적으로 사법부를 떠났다. 후 법무법인 화우 대표변호사, 영산대 부총장을 지냈다. 법조인으로서의 소신을 담은 책 ‘법과 정의를 향한 여정’, ‘권력, 정의, 판사’, ‘멋진 세상, 스키로 활강하다’를 발간하기도 했다. 현재는 ‘영산법률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이번 장편소설 ‘다섯 판사 이야기’ 발표는 2021년 제3의 인생, 작가로의 출발을 선언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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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박정희 대통령과 청운각(靑雲閣)이만유/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청운각은 경북 문경시에 있는 고 박정희(1917~1979) 대통령의 교사 시절 하숙집이다. 대한민국 5∼9대 대통령을 지낸 박정희 대통령이 1937년 3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1937.4∼1940.3월까지 3년간 문경서부심상소학교(현 문경초등학교)에서 훈도(訓導-일제 강점기 초등학교의 교원)로 초임 재직할 때, 인정 많고 남자 못지않은 호탕한 성격을 가진 김순아(金順牙) 아주머니 하숙집으로 1940. 4월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인의 길을 가기 전까지 이곳에서 기거하셨다. 이 하숙집 건물은 1928년(소화 3년)에 건축되었으며 1978. 10월 경상북도 보존 초가옥 제1호로 지정한 25평 규모의 초가집이다. 청년 박정희 훈도는 매일 새벽 6시가 되면 하숙집에서 가까운 문경읍 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잣밭산에 올라 기상나팔처럼 트럼펫을 불었다고 한다. 학생들은 일찍 일어나 공부하고 주민들은 부지런히 일하여 대대로 물려받은 가난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청운을 품고 있었다. 오늘 세계 속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새마을운동”이란 위대한 꿈이 이미 젊은 박정희 가슴 속에서 싹트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청운각 외벽 담장 사이에 살구나무 고사목 둥치 하나가 투명 상자 안에 보존 전시되어 있다. 이 살구나무는 박정희 훈도가 하숙할 당시 탐스러운 살구가 주렁주렁 열렸고 이 나무 아래에서 책을 읽고 사색하던 반려목(伴侶木)같이 애정을 가진 나무였는데, 1979년 10월 26일 서거한 이틀 뒤 낙엽이 다진 늦가을 나목에서 때 아닌 두 송이 살구꽃을 피우고 난 뒤 대통령을 따라 생을 마감하고 고사하였다고 전한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이 나무를 "충절의 나무”라고 불렀다. 청운각에는 대문채 옆에 디딜방아가 놓여 있다. 1978년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 훈도 시절의 추억에 잠겨 이곳 저것을 둘러보시다가 디딜방아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반가운 표정으로 "옛날 것하고 똑같구먼!” 하고는 한참 상념에 잠겼을 때 언뜻 눈시울을 붉혔다고 하는데, 이는 어릴 적 구미시 상모동 생가에도 디딜방아가 있었고 문득 어머니 생각이 나서 울컥하는 감정이 벅차 올랐기 때문이었다. 디딜방아에는 이런 사연이 있다. 박정희는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어머님이 박정희를 임신했을 때 연세가 45세였다. 늦은 나이에 남세스럽기도 하고, 원치 않은 임신에다가 가난한 살림에 6남매를 두고 있는 처지에서 또 아이를 갖는 것이 부담되었다. 더구나 같은 시기에 시집간 딸도 임신했다. 옛말에 한 대들보 밑에 두 생명이 태어나면 둘 중 어느 한쪽 아이가 잘못된다고 하는 속설이 있기도 해서 딸을 위해 유산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를 지우려고 남몰래 진한 간장을 한 사발을 마시기도, 섬돌과 언덕에서 굴러떨어지기, 밀기울 끓여 먹기, 버들강아지 뿌리를 달여 먹고 기절하기도 하고, 썩은 초가집 처마에서 떨어지는 검붉은 빛깔의 빗물인 지랑물을 마시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하였으나 결국 낙태가 되지 않아 최후의 방법으로 디딜방아 공이에 배를 대고 충격을 주었다가 허리를 다쳐 고생하였지만 끝내 아이를 지울 수가 없었다. 대통령이 디딜방아 앞에서 숙연해지고 눈물을 보인 것이 그런 고난의 시절을 보낸 어머니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늘이 점지해 준 생명을 인간이 어찌하겠는가? 그것도 유명한 지관(地官)들은 물론이고 조선 왕업을 도운 무학대사가 대통령 생가가 있는 금오산(金烏山)을 보고 두 왕이 태어날 명당이라는 뜻의 "금오산 이왕설(二王說)”을 남겼는데 그 주인공으로 태어날 왕의 기운을 사람이 지울 수가 없었다. 천명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1917년 같은 해 7일여 차로 어머니는 박정희를 출산하고 누나 역시 아이를 출산하였다. 박정희 출생 시 아이의 몸이 다른 아이에 비해 까맣고 눈만 반짝거렸다는데 사람들은 어머니께서 임신 때 낙태하려고 검은색 간장과 지랑물을 먹어서 그렇다고 하지만, 조부의 묘터가 하늘이 정해준 제왕지지(帝王之地) 명당으로 금오탁시(金烏啄屍) 발복(發福), 즉 금오(金烏)는 금까마귀로 금오산(金烏山) 정기를 타고 태어났기 때문에 태양의 신 삼족오(三足烏)를 닮아 까맣다고 하였다. 박정희 훈도가 하숙집에서 즐겨 드신 음식은 칼국수, 수제비, 비름나물이고 술은 막걸리를 좋아했다. 특히 비름나물 무침을 좋아해 하숙집 여주인이 수시로 밥상에 올렸다고 한다. 어린시절 학교까지 20여 리 시골 산길을 걸어 다녔는데 하루는 몹시 배가 고파 집에 당도하니, 어머니께서 바가지에 비름나물을 비벼서 막 드시려다가 아들과 함께 맛있게 먹었는데 보리쌀이 대부분이고 조금의 쌀이 섞인 밥에 비름나물과 참기름을 넣고 비빈 비빔밥의 맛은 평생 잊을 수 없는 별미였다. 이후 청와대에서 육영수 여사는 비름나물을 구해 비빔밥을 해드렸다. 그러나 서울 시장에서는 비름나물을 쉽게 구할 수 없게 되자 씨앗을 구해 작은 밭을 일구고 재배를 했다. 박대통령은 보리와 쌀 반반인 밥에 고추장과 참기름을 넣고 비빈 비름나물 비빔밥을 그 어떤 진수성찬이 있어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맛있게 드셨다고 전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사회생활 첫발을 디딘 문경과의 특별한 인연으로 교사 생활을 끝내고 문경을 떠난 이후 서거할 때까지 9회 정도 문경을 방문하셨다고 하며(청운각 관리소장 진술) 문경에 오실 때마다 늘 청운각을 들리셨다고 한다. 서거하기 전 1978년이 마지막 방문이 되었다. 박남우 청운회 회장 증언에 의하면 당시 김수학 경북지사가 조심스럽게 문경새재 올라가는 도로 포장을 건의하였다. 전국토의 산업화를 서두르는 대통령께서 예외로 우리의 문화와 역사가 스며있는 옛길 문경새재 도로를 포장하지 말고 흙길 그대로 잘 보존하라 당부하였다. 1976년 국무회의에서도 문경새재의 옛 정취가 사라져서는 안된다며 도로포장 금지를 엄하게 지시했다고 하였다. 아마도 훈도 시절 제자들과 소풍을 오고 시간 날 때마다 자주 찾아본 문경새재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추억이 있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래서 문경새재는 지금까지 옛 모습을 잃지 않고 전국에서 연간 수백만 명이 찾아와서 온 가족과 벗들이 맨발로 걷는 명소, 문경의 랜드마크가 된 것이다. 사람이 생을 영위하면서 10년 앞을 예견할 수 있다면 다 부자 되고 성공할 것인데 대다수 1년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역시 훌륭한 지도자는 달랐다. 선견지명으로 50년, 100년의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가진 판단에 의해 지금 우리 문경인들은 감사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배우 김지미는 백 년에 한 번 나는 미인이고, 박정희는 천 년에 한 번 나는 위인이다”라고 말하는 것일까. 문경에는 박정희 훈도와 관련되어 전해지는 이야기가 많다. 제자들과 진남교로 소풍 갔다가 위험을 무릅쓰고 익사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한 일과 하숙집으로 찾아 오거나 학교에서 일본인 교장이나 훈도가 없는 수업 시간 중간 중간 민족혼을 일깨워주는 말씀을 자주 하였다고 제자들은 생생하게 전한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 흔적으로는 문경새재 입구에 "문경새재”라는 휘호 표시석이 있고 1978년 청운각에 와서 기념 식수한 전나무가 당당하게 서 있다. 청운각 공원 중앙에는 통일을 기원하는 북과 장구 형상의 "고부이가(鼓缶而歌)”라는 조형물이 있다. 鼓缶而歌는 북 치고 장구 치고 노래하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대동 세상을 표현한 것이다. 주역에서는 고난과 역경을 넘어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혁신의 의미가 담겨있다. "하면 된다.”라는 굳은 의지를 다지고 박대통령의 업적을 가슴에 얹어본다. 세계인이 기억하는 박정희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이 없었다면 오늘의 한국은 없다.” 라며 "인류가 이룩한 성과 가운데 가장 놀라운 기적은 바로 박정희 대통령의 위대한 지도력으로 탄생한 대한민국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세계 정상의 석학이나 정치가들의 말을 반추해 본다. 우리는 5천 년 가난을 물리치고 세계 10대 경제 대국으로 우뚝 설 수 있도록 기틀을 마련하고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몸 바친 고 박정희 대통령의 정신과 유훈을 이어받아 문화강대국으로써 우뚝 섰다. 다음 세대에도 이어질 세세년년 발전과 번영을 위해 정진해야 한다. 청운각은 잠시 머물다 간 하숙집이 아니다. 청운(靑雲), 푸른 꿈과 드높은 이상(理想)이 시작된 공간이며 민족정신을 고양하는 산 교육장이다. 청운각에는 해마다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서거일과 11월 14일 탄생일에는 제자들의 모임인 청운회가 주관하는 추도제 및 숭모제를 올리고 있다. 문경민의 충절이 깃든 문경의 자랑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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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서편제보성소리축제 전국판소리·고수경연대회(9월30일-10월2일)■대회명칭 제24회 서편제보성소리축제 전국판소리·고수경연대회 ■대회목적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인 판소리의 계승발전을 위하여 경연대회를 통한 인재발굴 및 육성 ■대회일정 2022년 9월 30일(금) ~ 2022년 10월 2일(일) ※ 추모행사: 9. 30.(금) 14:00, 보성판소리성지 ■ 대회일시 및 장소 ◈예선 일 자 경 연 시 간 부 문 장 소 경연 순서 추첨 시간 10.1.(토) 10:00 ~ 판소리 대학‧일반부 보성군문화예술회관 2층 연습실 08:30 ~ 10:00 ~ 판소리 명창부 보성군문화예술회관 1층 공연장 08:30 ~ 10:00 ~ 고수 학생부 보성문화원 08:30 ~ 10:00 ~ 판소리 신인부(단심제) 보성군청소년문화의집 08:30 ~ 13:00 ~ 판소리 학생부 보성군청소년문화의집 10:00 ~ 13:00 ~ 고수 신인부(단심제), 대학‧일반부, 명고부 보성문화원 (신인부,대학․일반부) 10:00 ~ (명고부)13:00 ~ ◈ 본선 일 자 경연시간 부 문 장 소 경연순서 추첨시간 10. 2.(일) 09:30 ~ 판소리 학생부 보성군청소년문화의집 08:30 ~ 09:30 ~ 판소리 대학‧일반부 보성군문화예술회관 2층 연습실 08:30 ~ 10:00 ~ 고수 학생부, 대학‧일반부, 명고부 보성문화원 08:30 ~ 13:00 ~ 학생부 종합 보성문화원 12:00 ~ 13:30 ~ 판소리 명창부 보성군문화예술회관 1층 공연장 12:30 ~ ※ 위 일정 및 장소(예선‧본선)는 상황에 따라 취소 또는 변경될 수 있음. ※ 학생부 종합: 판소리 학생 고등부 대상수상자와 고수 학생부 대상수상자가 경연 ■ 참가자격 대한민국 국민으로 만 18세(2004. 9. 30. 이전 출생자) 이상의 남녀 또는 학생(초·중·고등학생) 1. 판소리 명창부는만 28세(1994. 9. 30. 이전 출생자) 이상 가. 판소리 5바탕 중 한바탕 완창자 또는 2시간 이상 발표회를 가진 자 나. 증빙자료 제출: 완창 발표회 음원(CD) 또는 공연 리플렛 2. 기존 수상자 참가 제한(본대회 및 다른 대회 모두 포함) - 동일종목·분야에서 최고훈격을 수상한 자는 최고훈격이 동일한 종목‧분야참가 제한 - 단, 최고훈격이 상이한 경우 동일종목‧분야 참가 가능하며, 이 경우에도 훈격의 하향신청은 불가 ■ 참가신청 1. 제출서류: 참가신청서 1부(소정양식, 반명함판 사진부착) ※ 판소리 명창부: 완창 발표회 음원(CD) 또는 리플렛 등 증빙자료 제출 ※ 경연대회 당일: 신분증 지참 필수 2. 신청서 교부 및 접수 ◦ 접수기간: 2022. 8. 16.(화) ~ 9. 23.(금) 18:00까지 도착분 ◦ 참 가 비:없음 ◦ 접수방법: 방문·우편·e-mail·FAX ※ 본인 및 대리신청 가능 ◦ 접 수 처: 서편제보성소리축제추진위원회(보성문화원) - e-mail: bs2629@hanmail.net - F A X: (061)853-2629 - 우 편: (59453)전남 보성군 보성읍 송재로 281-11 보성문화원 ◦ 접수안내: (061)850-5892 / 852-2621, 서편제보성소리축제홈페이지 (http://www.boseong.go.kr/tour/festivity/sopyonje) ※ 접수 후 반드시 전화 확인하기 바람 ※ 코로나19 상황에 따라 무관중 경연대회로 전환될 경우 참석자 제한할 수 있습니다. - 참가자 및 동반1인 : 코로나19 PCR검사결과 또는 신속항원검사 음성확인증 제출(경연일 기준 48시간 이내) - 음성 결과제출이 없을 경우 경연장 입장 불가 ■ 대회부문 부 문 경연시간(예선/본선) 비 고 판소리 명창부 30분 이상 / 20분 이상 - 예선 경연대목: 추첨 - 본선 경연대목: 자유 선택 (단, 경연대목이 중복될 때에는추첨에 의함) 대학 및 일반부 15분 내외 / 15분 내외 - 예선과 본선의 소리대목 중복 불가 신인부(단심제) 5분 내외 학생부 - 고등부 7분 내외 / 10분 내외 학생부 - 중등부 5분 내외 / 7분 내외 학생부 - 초등부 5분 내외 / 5분 내외 고 수 명고부 10분 내외 / 10분 내외 대학 및 일반부 7분 내외 / 7분 내외 신인부(단심제) 5분 내외 학생부 5분 내외 / 5분 내외 ※ 경연시간은 대회의 효율적 진행을 위해 조정할 수 있음. ※ 판소리 경연 시 고수는 집행부 지정고수로 하며, 필요시 경연자 대동 가능 ※ 판소리 대학 및 일반부: 후 창자는 바로 앞 창자의 소리대목을 다시 할 수 없음. 다만 바로 앞 창자 소리대목 전체의 ⅕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전반부 또는 후반부에서 소리를 이끌어 나가거나 마무리를 위한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함 ■ 시상내용 본선 경연 완료 후 현장 시상(신인부(단심제)는 예선 경연 완료 후 현장 시상) ※명창부 대상 특전: 수상자는 보성소리 발전연구 결과로 12개월이내에 보성군내에서 공연발표를 하게 되며, 이때 보성군은 1회에 한하여 공연 무대, 홍보, 음향등을 무상 지원 ※ 시상금은 소득세법에 의거 원천징수 8.8% 공제 후 무통장 입금 ※ 학생부 종합부문 수상자에 대해서는 부분별(판소리, 고수) 시상금은 지급되지 않음. ※청중평가단 인기상: 청중평가단만의 점수로 명창부 본선 경연자 중에서 결정 (훈격: 서편제보성소리축제추진위원장) ※본 행사 훈격 및 시상계획은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 심사항목 판소리 공력(30%) 박자(30%) 성음(20%) 음정(10%) 발림(10%) 고 수 한배(30%) 공력(20%) 강약(20%) 기교(20%) 자세(10%) ※ 심사위원의 점수를 합산하여 고득점순으로 등위를 정한다. ■ 심사규정 1. 심사회피로 인한 경연자의 점수는 채점한 심사위원 점수 중 최고점과 최하점을제외하고 나머지 심사위원 점수의 평균점을 회피한 심사위원점수로 부여하여 합계점수를 산출한다. 2. 본 대회는 직접스승 및 8촌 이내 친인척의 심사회피제도를 적용하므로참가자는해당 심사위원의 심사회피를 경연전에 신청해야 한다. 만약 심사회피를 신청하지 않아 수상을 한 후 회피신청 사유가 있음이 발견될 경우에는수상 취소를 결정할 수 있고, 수상자는 상장, 상패, 상금을 반환하여야 한다. ※ 판소리 명창부에 한해 경연참가자의 이해관계가 있는 심사위원은 기피신청 여부와 관계없이 서편제보성소리축제추진위원회 심사위원 선정위원회 직권으로 심사위원에서 배제한다.(예선과 본선 모두 적용) ■ 심사결과 발표방법 심사위원별 점수를 경연 직후 또는 후창자 경연 중에 스크린(전광판)으로 공개 ■ 수상자 결정방법 수상자는 심사결과에 따라 순위별로 결정한다. 같은 부문에 동점자가 있는경우에는 연장자를 선순위로 한다. 학생부에 동점자가 있는 경우에는고학년을 선순위로 하며 같은 학년일 경우에는 생년월일을 대조하여 연장자를 선순위로 한다. ■ 코로나19 방역수칙 준수사항 경연대회 당일의 코로나19 방역수칙(사회적거리두기 행정명령) 적용 ■ 기타사항 별도의 영상촬영 및 온라인 송출 없음 ※ 코로나19 상황에 따라 무관중 경연대회로 진행 시 경연대회 실시간 영상송출(대회 종료 후 녹화영상송출은 없음) ■ 세부 프로그램 일정표 장소별 시간별 보성군문화 예술회관 보성군청소년 문화의집 보성문화원 보성 판소리성지 월ㆍ일 시 간 1층 공연장 2층 연습실 9. 30. (금) 14:00 ~15:00 ◦서편제 보성소리명창 추모행사 및 추모공연 10. 1. (토) 09:00 ~10:00 ◦기념공연 및 기념식 10:00 ~11:00 ◦전국판소리경연대회 -명창부(예선) ※추첨: 08:30 ◦전국판소리경연대회 -대학 및 일반부 (예선) ※추첨: 08:30 ◦전국판소리경연대회 -신인부 ※추첨: 08:30 ◦전국고수경연대회 -학생부(예선) ※추첨: 08:30 11:00 ~12:00 12:00 ~13:00 13:00 ~ ◦전국판소리경연대회 -학생부(예선) ※추첨: 10:00 ◦전국고수경연대회 -신인부, 대학·일반부, 명고부(예선) ※추첨: 10:00 (신인부,대학·일반부) 13:00 명고부 19:00 ~20:00 ◦명인‧명창 고수열전 10. 2. (일) 09:30 ~10:00 ◦전국판소리경연대회 -대학 및 일반부 (본선) ※추첨: 08:30 ◦전국판소리경연대회 -학생부(본선) ※추첨: 08:30 10:00 ~11:00 ◦KBS국악프로그램 리허설 ◦전국고수경연대회 -학생부ㆍ대학·일반부ㆍ 명고부(본선) ※추첨: 08:30 11:00 ~13:00 13:00 ~13:30 ◦학생부종합대상경연대회 (본선) -판소리 및 고수 ※추첨: 12:00 13:30 ~15:00 ◦전국판소리경연대회 -명창부(본선) ※추첨: 12:30 ◦시상식 15:00 ~16:00 ◦KBS국악프로그램 녹화 16:00 ~16:30 ◦역대 대통령상 수상자 축하공연 ※ 위 일정은 상황에 따라 취소 또는 변경될 수 있음 ■ 서편제보성소리축제 전국 판소리‧고수경연대회 역대 수상자 명단 판소리 고 수 학생부 종합 명창부 대학‧일반부 신인부 학생부 명고부 대학‧일반부 신인부 학생부 고등부 중등부 초등부 제1회 1998년 - 추상수 성남 이정순 광명 김정은 여수여자고 최잔디 광주중앙초 - - - - - 제2회 1999년 유판길 서울 마미숙 광주 김연례 목포 박은실 광주예술고 김소진 광주동운초 - - - - - 제3회 2000년 박정아 광주 오혜연 서울 - 임서연 군산 조나엽 강진 - - - - - 제4회 2001년 이귀례 익산 박명자 성남 - 김소희 남원서진여고 강재민 광주문산초 - - - - - 제5회 2002년 허 숙 여수 김다정 광주 이동래 보성 김혜라 보성고 이성현 서울광장초 - - - - - 제6회 2003년 이재영 보성 백금렬 고양 - 정지혜 서울국악예술고 김미영 광주풍암중 신혜인 광주경양초 - - - - - 제7회 2004년 허종열 서울 이은비 광주 - 홍준표 대구 정아영 대구 양승은 광주 - - - - - 제8회 2005년 백금렬 보성 이숙영 서울 이기쁨 파주 유성실 김제 유다운 고흥 안유미 보성 고정훈 진도 이재진 경주 박초롱 경산 - - 제9회 2006년 라경자 고흥 박지영 서울 장세웅 서울 백민정 광주예술고 임한울 광주봉산중 양혜원 남원노암초 임용남 서울 김동근 광주 정상화 서울 - - 제10회 2007년 남궁정애 성남 김계영 서울 이일진 고양 이선미 광주예술고 이진우 서울국악예술중 정은영 광주대성초 김준영 완도 고현태 전주 박경도 광주 - - 제11회 2008년 문명숙 전주 채원영 남원 조혜숙 전주 오선지 전남예술고 윤영진 조선대부속중 김승수 광주도산초 정상화 안성 조가완 광주 이병열 광주 - - 제12회 2009년 박미정 광주 임성희 안성 김옥순 광주 주희라 광주예술고 조정규 전주온고을중 윤정이 광주교대부설초 정인성 광주 최재영 서울 김소라 서울 - - 제13회 2010년 이재영 보성 최한이 천안 양인심 순천 박경태 광주 박성열 익산 이승훈 광주 김병태 고양 박성우 고양 이진수 광주 - - 제14회 2011년 김학용 서울 오혜원 진도 정석호 광주 송선호 서울압구정고 이채은 화순제일중 양수아 목포하당초 조가완 광주 김정환 담양 정신이 전주 추재형 진도석교고 - 제15회 2012년 김현주 순천 송혜원 진도 김병희 대전 정서희 경남예술고 유시은 산청단성중 심민서 진주평거초 주현주 광주 장홍준 남원 양승화 순천 한재민 함평나산고 정서희 경남예술고 제16회 2013년 김명숙 서울 이철홍 목포 박창석 진도 정윤형 전주예술고 김가을 보성여자중 조세리 성남정자초 김준영 광주 진정남 울산 최승희 서울 조의연 영광초 정윤형 전주예술고 제17회 2014년 윤종호 나주 이선미 광주 이 숙 광주 김가을 보성고 노희선 화순제일중 김한별 보성남초 안연섭 광주 이주현 남원 이춘효 목포 박상민 광주예술고 김가을 보성고 제18회 2015년 윤상호 정읍 문해돋이 인천 김강인 남양주 박상훈 서울전통예술고 송자연 국립전통예술중 유송은 광주송우초 조요한 광주 대대호 광주 정행정 진주 양인승 진도국악고 박상훈 서울전통예술고 제19회 2016년 양희빈 서울 윤혜선 나주 김금자 창원 유시은 경남예술고 양수아 국립국악중 박정우 선일초 김제훈 강진 채규룡 진도 김보금 남원 윤지혁 목포덕인중 유시은 경남예술고 제20회 2017년 박정희 무안 김주리 서울 김은숙 광주 박서희 광주예술고 김선우 남원한빛중 박혜인 광주운남초 원대근 여수 박상민 안성 정대희 광주 윤지혁 진도국악고 박서희 광주예술고 제21회 2018년 어연경 고양 이이화 서울 양동용 서울 김정욱 광주예술고 박신웅 전주예술중 임아진 정읍한솔초 양인승 나주 한재민 광주 오영환 광주 윤지혁 진도국악고 김정욱 광주예술고 제22회 2019년 김미진 서울 정승기 광주 손순임 광주 윤지혁 진도국악고 박지민 국립국악중 이지윤 영천초 이충인 부산 조인경 경기 표진이 전주 김정욱 광주예술고 김정욱 광주예술고 제23회 2021년 유재순 서울 강예빈 전주 조헌성 전남 김수진 원광정보예술고 김송아 전주예술중 범하은 광주한울초 김성찬 전남 서형준 광주 박갑렬 전남 박수현 광주예술고 김수진 원광정보예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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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활용 청사진 나왔다 "문화예술 랜드마크로"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21일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케이(K)-콘텐츠로 한국경제를 선도하고, 청와대는 문화예술 랜드마크로 만들겠다”고 밝혔다.앞서 청와대는 윤석열정부 출범과 동시에 지난 5월10일 국민에게 전면 개방됐다. 지난 2개월간 125만명의 국민들이 방문하며 인기를 끌었다. 동시에 인파가 몰리면서 훼손 우려의 목소리도 제기되면서 문화·예술·역사적 자원인 청와대를 어떻게 보존·활용할지가 숙제였다. 특히 청와대 개방은 관광업계의 뜨거운 관심사로 떠올랐다.박 장관은 이날 "청와대를 문화예술 랜드마크로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국민의 품으로 돌아온 청와대를 원형 보존의 원칙하에 문화예술을 접목해 ‘살아 숨쉬는 청와대’로 조성한다는 방침이다.박 장관은 "역대 대통령의 자취와 흔적, 600점이 넘는 미술작품, 5만여 그루의 수목, 침류각·오운정 등의 문화재 등 청와대가 가진 콘텐츠를 내부의 건축물, 야외공간과 결합해 우리나라 최고의 상장자산으로 정교하게 브랜드화하겠다”고 말했다.본관 내부 활용과 관련해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등을 언급하며 "본관과 관저는 미술품 상설 전시장으로 꾸미고, 귀한 손님을 맞이하던 영빈관은 프리미엄 근현대 미술품 전시장으로 재구성한다"고 말했다. 또 녹지원 등 야외공간은 조각공원으로 조성하고 시민 소통공간으로 거듭날 춘추관은 민간에 대관하는 특별 전시공간으로 활용한다.박 장관은 "올 가을 청와대 소장품 기획전을 준비중”이라며 "‘이건희 컬렉션’ 등 국내외 작품을 유치하고, 전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또 춘추관 첫 전시행사로 오는 8~9월 장애인문화예술축제를 계획 중이다.본관과 관저, 구 본관 터를 중심으로 대통령 역사문화공간도 조성한다. 이승만 대통령 며느리인 조혜자씨, 윤보선 대통령의 아들인 윤상구씨,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인 박지만씨, 노태우·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의 아들인 노재헌·김현철·김홍업씨 등을 자문위원으로 꾸려 그들에게 역대 대통령의 모습과 자신들의 삶의 경험을 스토리텔링하며 국민 통합 효과를 제고한다는 방침이다. 문화부가 청와대 활용 청사진을 밝힘에 따라 개방된 청와대를 누가 관리할지 여부도 주목된다. 그동안 대통령실과 정부부처, 서울시 등이 논의의 주체였고, 현재 문화재청이 임시관리를 맡고 있다. 서울시는 청와대를 "경복궁과 창경궁 등 고궁과 북촌, 서촌, 인사동, 광화문광장을 잇는 서울관광 클러스터의 핵심”으로 보고 있다.박 장관은 이와 관련해 "(청와대 운영은) 민간협력의 롤모델이 될 것”이라는 기본 원칙만 언급했다.한편 박 장관은 ‘국민과 함께하는 세계 일류 문화 매력 국가’를 비전으로 제시한 뒤 5대 핵심과제로 △살아 숨 쉬는 청와대, △케이콘텐츠가 이끄는 우리경제의 도약 △자유의 가치와 창의가 넘치는 창작환경 조성 △문화의 공정한 접근 기회 보장 △문화가 여는 지역균형 시대를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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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문경의 King Road 4] 문경을 방문한 역대 대통령이만유 (향토사 연구원) 절대왕정 또는 절대군주제 하의 왕이 다스리는 시대는 아니지만 지금도 한 국가의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의 권한과 책무는 그때와 비교할 수 없지만, 그에 못지않게 크다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1919년 4월 11일 상해 임시정부 수립을 시작으로 하여 광복 이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했다. 이렇듯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국민이 주인인 시대에 살고 있다. 왕은 아니지만 한 국가를 대표하는 국가 통치자로서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이 문경을 방문했던 발자취를 더듬어보며 단편적이나마 문경과 함께한 근현대 역사를 살펴보기로 한다. 1. 이승만 대통령 대한민국 초대, 제2대, 제3대 이승만 대통령의 문경 방문은 1957년 9월 26일 문경시멘트(쌍용양회 문경공장) 공장 준공식 때였다. 국내 최초의 문경시멘트 공장 건립은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 재정 지원을 통해 1955년 11월 30일 기공하여 1957년 9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준공식을 했다. 당시 해외 원조가 대부분 소비재 중심이었던데 반해 문경시멘트 공장 건립은 생산재 시설에 대한 투자라는 점에서 의의를 지녔다. 연간 20만 톤의 시멘트를 생산하는 곳으로 당시 충주비료 공장과 함께 수학여행 및 산업시설 견학지로 유명했었다. 대한민국 산업화에 크게 기여한 쌍용양회 문경공장은 61년 만인 2018년 4월 30일 조업을 중단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나 경상북도와 문경시가 산업 역사와 보존 가치가 높은 건축물을 "산업 유산”으로 지정하고 공장을 포함 주변 20만㎡ 용지에 사업비 2,697억 원을 투입해 수소연료전지발전소, 익스트림 스포츠 테마파크, 영화 창작 스튜디오, 국립산업역사박물관, 청년 창업가와 예술가들을 위한 문화 창작 스튜디오 설치 등 도시 재생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2. 윤보선 대통령 제4대 윤보선 대통령은 1962년 3월 퇴임 후 그해 봄에 문경새재를 다녀갔다. 문경새재는 조선 세 번째 임금인 태종 14년(1414년)에 개척된 옛길로 사적 147호로 지정된 곳이며 군사 및 교통의 요충지인 문경새재에 산행을 오셨다가 새재산장(새재할매집)의 돼지고기 양념구이를 드셨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문경새재를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3. 박정희 대통령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및 제5·6·7·8·9대 대통령으로 18년 5개월간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은 만주군관학교 시절부터 문경에 총 10여 차례 방문하였다고 한다. 1976년과 1978년 11월 24일에 청운각, 문경초등학교, 문경새재를 방문하였으며 이때 문경새재 옛길을 포장하지 말고 그대로 보존하라는 지시를 하여 지금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사랑을 받는 맨발로 걸을 수 있는 명품 길 문경새재(명승 32호)가 자연 그대로 보존될 수 있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1937년대구사범학교 졸업 후 초임지로 1937.4∼1940.3월까지 3년간 문경보통학교(문경서부심상소학교/현 문경초등학교)에서 훈도(訓導=교사)로 재직한 관계로 문경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 곳이다.그때 박 전 대통령이 거처했던 하숙집으로 청운각(1978년 10월 경상북도 보존 초가옥 1호로 지정)이 보존되어 있고, 여기에 관련 자료와 함께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영부인의 영정이 모셔져 있어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 이곳에서 매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추모제가 열린다. 4. 최규하 대통령 제10대 최규하 대통령은 1980년 7월 29일 가은읍 수해 현장을 시찰하고 문경새재를 방문하였다. 이때 건의가 있어 1관문 주흘관까지 도로포장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5. 전두환 대통령 제11·12대 전두환 대통령은 1983년 4월 문경군청, 대성새마을유아원과 수평초등학교를 방문하고 예비군 훈련을 참관하였다. 6. 노무현 대통령 제16대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12월 15일 문경휴게소 광장에서 열린 중부내륙고속도로 충주-상주 구간 개통식에 참석하였고, 퇴임 후인 2008년 6월 23일 권양숙 여사와 함께 관광차 문경새재와 오미자체험관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7. 박근혜 대통령 제18대 박근혜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전인 2006년 12월 27일 문경을 방문하여 마성면사무소에서 지역 인사들과 인사를 나누고 "문경 거점산지유통 사업설명회”에 참석하여 300여 농민들의 박수 속에 입장하여 사업추진 상황을 듣고,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문경초교 교사시설 하숙집이었던 청운각에 도착해 옛 제자들과 주민들의 영접을 받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2007년 8월 14일 오후 6시 30분 중부내륙고속도로 하행선 문경휴게소에 잠시 들려, 문경을 비롯해 영주, 봉화, 예천, 안동, 상주, 김천 등에서 활동 중인 자신의 캠프 관계자와 휴게소 이용객 등 200여 명으로부터 열열한 환영을 받고 구미로 떠났다. ☆ 청운각 박근혜 오동나무 이야기 10여 년 전 청운각 마당의 옛 우물에 오동나무 한 그루가 솟아오르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관계자에 의하면 2006년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가 청운각을 방문한 뒤 이듬해 우물 속 벽에 작은 나무 하나가 자라기 시작하였는데 이상하게도 생육을 멈추고 있다가 2011년 7월(18대 대선을 17개월 앞둔 시점)에 갑자기 잎과 가지가 무성히 자라 높이 2m의 오동나무가 우물 위로 솟아올랐다는 것이다. 오동나무는 예부터 봉황이 둥지를 튼다는 나무로 전해져 왔는데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는길조로 여기며,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이 하늘나라에서 대권 도전에 나선 딸을 돕기 위해 신성한 오동나무를 보낸 것이라는 입소문이 돌았다. 이 소식이 퍼져나가자 전국에서 많은 사람이 이 오동나무를 구경하거나 기를 받기 위해 몰려왔다. 우연의 일치인지 하늘의 뜻인지 딸 박근혜는 제18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위에 열거한 대통령 방문지를 토대로 기존 관광지와 연계하여 대통령이 남긴 일화를 모아 스토리텔링화하여 "길의 고장 문경, 대통령의 발자취를 찾아서”라는 관광코스를 개발하는 것도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 관광코스 : 문경새재⇨청운각⇨쌍용양회공장⇨동로 경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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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靑瓦臺) 개방에 관한 10문 10답1. 개방 의미와 기념행사 청와대를 국민 모두가 누리는 열린 공간, 역사와 미래가 공존하는 상징적 공간으로 국민 품으로 돌려준다는 약속이 실현된다. 청와대는 제왕적 권력의 상징에서 ‘국민 쉼터’로, 불통과 분열의 상징에서 ‘국민 통합 공간’으로 태어나는 것. 역사적인 청와대 개방을 기념하고 새 시대를 여는 희망과 기쁨을 국민들과 함께 하기 위해 다양한 문화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소수의 권력자들만 향유했던 다양한 시설과 경치를 국민 모두가 여유롭게 누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 ‘약속을 담다’-74년 만에 국민의 품으로 완전히 돌아오는 역사적인 순간을 축하하는 공연 ‘희망을 나누다’-푸른 잔디가 펼쳐진 녹지원과 춘추관 앞에서 즐거운 문화예술공연 ‘역사를 그리다’-국빈을 맞이하던 영빈관과 왕의 어머니들을 기리는 칠궁 역사공연 ‘자연을 품다’-경복궁에서 청와대를 거쳐 북악산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길 ‘문화를 펼치다’-청와대 곳곳에서 남녀노소 함께 즐기는 문화체험 축제의 장 ‘전국을 누리다’-전국 청와대 유관장소(세종 대통령기록관, 청주 청남대, 합천 청와대세트장)에 서도 청와대 개방을 기념하는 특별 행사 ‘청와대, 국민품으로’ 운영 시간 2022년 5월 10일(화) - 5월 22일(일) * 5월 10일(화) 낮 12시 ~ 20시 * 5월 11일(수) ~ 21일(토) 07시 ~ 19시 * 5월 22일(일) 추후 공지 기념 행사 장소-청와대, 경복궁, 북악산 일대, 전국 유관장소 2. 역사적 기능은? 답-고려시대 남경(南京)의 이궁(離宮)으로 사용. 조선시대 경복궁 후원. 어영(御營)·연무장(鍊武場)·과거장(科擧場)·친경(親耕)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 제7·8·9대 조선총독 관저, 광복 후 조선주둔군 사령관 관저, 1948년 8월 대한민국 대통령 집무실, 2022년 5월 초까지. 이 집무실에는 회의실·접견실·주거실·경호실·비서실·영빈관 등 기능을 하였다. 3. 명칭의 베경은? ‘경무대(景武臺)’-1960년 4월까지 초대·2대·3대 이승만 대통령 12년간 집무실 명칭. ‘청와대(靑瓦臺)’-1960년 8월부터 제2공화국 대통령(윤보선)부터 사용. 대리석 본관 건물이 청기와로 이어져 있는 데서 연유하였다. 4. 재임 대통령과 기간은? 이승만(1948∼1960) 1963∼1979년(5∼9대) 박정희(朴正熙), 1979∼1980년(10대) 최규하(崔圭夏), 1980∼1988년(11∼12대) 전두환(全斗煥), 1988∼1993년(13대) 노태우(盧泰愚), 1993∼1998년(제14대) 김영삼(金泳三), 1998∼2003년(제15대) 김대중(金大中), 2003∼2008년(제16대) 노무현(盧武鉉), 2008∼2013년(제17대) 이명박(李明博), 2013~2017년(제18대)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이 거쳐 갔다. 2017년(제19대) 문재인(文在寅) 대통령이 집무하였다. 5. 본관 청와대는? 대통령 집무와 외빈 접견 등에 사용되는 건물로 외국 국가원수나 외교사절이 방문했을 때 사용하였다. 전통 건축양식을 통해 우리 문화를 보여줄 수 있게 건축양식 중 가장 격조가 높고 아름답다는 팔작(八作)지붕을 올리고 청기와를 이었다. 30만 장이나 되는 청기와는 일반 도자기를 굽듯이 한 개 한 개 구워 내어 100년 이상을 견딜 수 있는 강도를 지녔다고 한다. 건물 앞 잔디마당은 국빈 환영행사와 육·해·공군 의장대, 전통의장대 사열 등이 행해지는 곳이다. 6. 영빈관(迎賓館)은? 대규모 회의와 외국 국빈들을 위한 공식행사 개최 건물. 18개의 돌기둥이 건물 전체를 떠받들고 있는 웅장한 건물이다. 특히 전면에 있는 4개의 돌기둥은 2층까지 뻗어 있는 높이 13m, 둘레가 3m이며 내부는 무궁화·월계수·태극무늬가 형상화되어 있다. 7. 상춘재(常春齋)는? 전통적인 한식 가옥으로 외빈접견 등에 사용. 온돌방 1개와 대청마루가 있는 연건평 116평이다. 8. 녹지원(綠地園)은? 청와대 경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120여 종의 나무가 있으며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식수가 있는 곳. 1,000여 평의 평지에 잔디를 심어 야외 행사장으로 이용. 주변에는 녹지원을 상징하는 소나무인 한국산 반송이 있는데 수령은 약 310년에 이르며 높이는 16m이다. 9. 관저(官邸)는? 전통한식으로 본채는 팔작(八作)지붕의 겹처마에 청기와를 얹은 ‘ㄱ’자형 지붕 형태이며 구성은 본채·별채·대문채·사랑채·회랑으로 되어 있다. 10. 춘추관(春秋館)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역사기록을 맡아보던 관아인 춘추관·예문춘추관에서 비롯된 것. 1주위 경관과 잘 어울리도록 맞배지붕에 토기와를 올려 전통적인 우아한 멋을 살린 건물이다. 대통령의 기자회견 장소와 출입기자들의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는데 언론사 기자 78명이 상주하는 청와대 프레스센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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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옥중편지 문화재 된다일제강점기 무력을 통한 독립을 추진한 비밀단체 ‘대한광복회’ 총사령을 지낸 박상진(1884∼1921) 의사 관련 유물이 국가등록문화재가 된다. 문화재청은 ‘박상진 의사 옥중 편지 및 상덕태상회 청구서’를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 예고하고, ‘대통령 전용 디젤전기동차’를 비롯한 옛 철도차량 4건을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했다고 7일 밝혔다.‘박상진 의사 옥중 편지’는 광복회 회원이 친일 부호 처단 사건 등으로 체포됐을 무렵 공주 감옥에 투옥된 박 의사가 동생들에게 쓴 가로 32.8㎝, 세로 14㎝의 편지다. 작성 시점은 2018년 4월로, 실력이 좋은 변호사를 선임해 달라는 부탁을 담았다.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 청구서’는 미쓰이(三井)물산 부산출장소가 1915년 2월 상덕태상회에 물품 대금을 요청한 서류다. 소재지는 울산박물관이다. 독립운동 재원을 마련하고 비밀 연락을 위한 거점으로 활용된 상덕태상회의 실체와 규모, 존속 기간을 알려 주는 유물이다. 문화재청은 이들 편지와 청구서가 1910년대 군대 양성, 무력 투쟁, 군자금 모집 등을 추진한 광복회와 총사령 박 의사를 재조명하는 자료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고 밝혔다. 이번에 등록문화재가 된 철도차량은 ‘대통령 전용 디젤전기동차’ ‘터우5형 증기기관차 700호’ ‘협궤 디젤동차 163호’ ‘협궤 객차 18011호’다. ‘대통령 전용 디젤전기동차’는 1969∼2001년 박정희 전 대통령부터 김대중 전 대통령까지 전임 대통령의 지역 순시 등에 이용됐다. 두 량으로 구성되며, 한 량의 길이는 25m이고 대통령 집무실, 침실, 수행원실 등을 갖췄다. ‘터우5형 증기기관차 700호’는 1914년 생산돼 1919∼1935년까지 운행됐으며, 국내에 현존하는 유일한 터우형 증기기관차다. 1965년 인천공작창에서 제작된 ‘협궤 디젤동차 163호’와 ‘협궤 객차 18011호’는 각각 수원과 인천을 잇는 ‘수인선’과 수원과 여주 사이에 놓인 ‘수여선’ 협궤철도를 오갔다.